* 지안님 리퀘
* 란마½ 설정을 가져왔어요.
* 어수선하니, 다소 과장된 요소가 있습니다. 캐붕주의 기타 여러 주의(마른세수)
1.
툭. 투두둑. 솨아아-. 예고도 없이 떨어지는 빗소리에 마틴 챌피는 창을 흘긋 쳐다보았다. 물방울이 갈래져 어지럽게 흐르는 창으로 그의 모습이 비추었다. 까만 밤을 배경으로 어스름히 비친 그의 얼굴은 제법 만족스러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갑작스럽긴 하지만 비오는 밤도 나쁘지 않다. 운치 있고 좋은걸, 그래, 이벤트라고 하자. 마틴은 작게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검지 끝으로 찻잔 위를 매끄럽게 문질렀다.
오늘도 이렇게 하루가 끝나간다. 마틴 챌피는 밀크티를 즐기며 남은 오늘을 만끽하는 중이었다. 향긋한 냄새와, 혀끝에 달착지근하게 감기는 맛, 손바닥에 은근하게 퍼지는 따뜻한 온기, 번뇌를 씻어 내리듯 시원하게 쏟아지는 빗소리. 이런 평화가 오늘로서 끝이 난다니 아쉽기까지 할 지경이었다만, 그런 생각을 하는 것조차 시간낭비였다. 이런 나날이 언제 다시 돌아올지 모른다. 그러니 마틴은 얼마 남지 않은 그의 하루를 가장 완벽하게 즐겨야만 했다. 내일이면 영국식 밀크티에 감히 우유 먼저 넣고 차를 넣는다는 끔찍한 생각을 하는 이하랑과 정티엔이 돌아온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아마 지금쯤 포트레너드에 도착하지 않았을까 싶지만, 굳이 마중 나가 반길 사이는 아니었으니 얼굴을 보게 되는 것은 내일이다.
티엔과 하랑이 그랑플럼을 비운 이유는 아시아의 사이퍼를 물색하고 영입하기 위해 떠난 출장 때문이었다. 그들은 티엔의 모국인 중국으로 갔다. 아마 땅이 넓고 사람이 많은 만큼 다양한 사이퍼가 있을 것이니 티엔이 하는 말로 탁월한 선택이 될 수 있을 것이었다. 능력자의 물색은 훌륭한 인재의 영입은 물론이요, 그 과정에서 경험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하랑에게 있어서도 좋은 경험이 되겠지. ‘어쨌든 수련이란 소리 아니야?’ 그러한 이유로 함께 데려 가겠다는 티엔의 말에 하랑은 괜히 뾰루퉁 입술을 내밀고 투덜거렸으나, 조국과 가까운 곳에 간다는 사실만으로도 제법 들떠있는 모습을 숨기지는 못했다. 아직 어리긴 어리다니까. 하지만 그 심정이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기에, 떠나던 날 마틴은 그들에게 잘 다녀오라고 온 마음을 다해 기쁘게 손 흔들어 주었다. 떠나는 뒷모습이 점이 되어 이내 안개 속으로 사라질 때까지, 기쁘게, 매우 기쁘게!
특별함이라곤 티끌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단조롭기만 한 하루하루가 그렇게 속 편할 수가 없었다. 아마 재단에 들어온 이후로 가장 평안한 시간을 보내고 있지는 않나, 마틴은 그리 생각했다. 혈기를 주체하지 못하고 자잘한 사고치는 하랑이 없으니 사춘기 자녀를 둔 학부모처럼 수습하느라 애쓸 일도 없었고, 얼굴만 보아도 불편한, 존재 자체가 정신적 피로인 티엔이 없으니 단 두 사람 없는 것만으로도 삶이 이렇게 윤택해질 수 있구나 하고 느껴질 지경이었다. 어쩌면 아마 하늘이 그랑플럼에 정티엔과 이하랑을 내려준 것은 이런 아무것도 아닐 뿐일 소소하고 평화로운 일상의 소중함을 일깨워주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깨달았으니 이제 매일은 안 될까요? 애석하게도 하늘이 허락한 평화는 오늘까지였고, 그렇기에 더욱 애틋하다. 그렇기 때문에 마틴은 남은 시간의 평화를 만끽하는데 아주 필사적이었다.
-쿵쿵
음? 빗소리를 덮은 적막을 거두어내는 듯한 문소리에, 차의 향을 음미하던 마틴은 현관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였다. 이 시간에 올 사람이 없는데……. 마틴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찻잔을 테이블 위에 올려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차향에 취한 탓인지 마틴에게 크게 의심하는 기색은 없었다. 그는 현관문으로 걸어가며 물었다. “누구세요?”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 없이 또 퉁퉁퉁, 하고 문을 두드리는 소리만 울릴 뿐이었다. 현관문 앞에 서고 나서야 무언가 이상한 것 같다는 생각을 했으나, 대수롭지 않게 문고리를 잡았다. 평화로운 기분에 한껏 취한 마틴은 자신의 하루가 완벽하게 끝이 날 것이라는 사실에 단 한 치의 의심도 없었으므로. 의심이라도 했으면 마음의 준비라도 할 수 있었을 것이었다. 철컥.
“누구세요?”
끼익, 문을 열자 벽에 차단되어 아득하게 들리던 빗소리가 시원하게 쏟아졌다. 그리고 쏟아지는 빗줄기 속에는, 제 몸집만한 처음 보는 백호 한마리가 비를 쫄딱 맞은 모양새로 서있었다. 거 봐. 별 일 아니잖아. 마틴은 예사처럼 상냥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런. 잘못 찾아오신 것 같네요. 그럼 빗길에 조심히 가시길.”
미련 없이 여상스레 현관문을 닫았다. 겨우 문 한 장에 집 안으로 범람하듯 몰아치던 빗소리가 현실감을 잃고 아득히 멀어졌다. 아주 짧은 소란 끝에 찾아온 고요가 금세 낯설어지기라도 한 것처럼 마틴은 제자리에서 빙글 돌아서 뒷머리를 현관문에 기대었다. 꿈결에 젖은 듯 눈을 감았다. 실제로 보는 것은 어린 시절 동물원에서 본 이후로 처음이었다. 괜히 가슴이 두근거렸다. 호랑이라.
호랑이라는 동물은 식육목의 고양이과 포유류로 황갈색 바탕에 검은 가로 줄무늬가 특징적이다. 같은 고양이과라고는 하지만 일상의 어디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고양이와는 달리, 호랑이는 동물원에 가서나야 철창 너머 저 멀리서 겨우 볼 수 있었다. 그런 호랑이를 동물원도 아니고, 산림‧관목림‧덤불따위의 주서식지에서도 아니고, 자신의 거주지에서 이렇게 바로 코앞 볼 수 있었다니, 심지어 그냥 호랑이도 아니고 돌연변이종으로 10만분의 1이라는 확률로 태어난다는 그 귀하디귀한 백호님라니! 이거 참 운이 좋다고 해야 할지……. 무슨 일로 집을 잘못 찾아왔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래, 동양권—티엔의 나라를 포함하여—에서는 백호를 상서로운 영물로 여겨왔다고 하니 보통 좋은 일이 일어날 모양이 아니었다. 세상에, 대체 얼마나 좋은 일이 있으려고 이렇게…….
가슴이 점점 더 세게 쿵쾅댔다. 그 소리가 얼마나 센지, 아득히 들리던 빗소리마저 지워지고 심장 소리로 머리가 가득 차 어지러울 정도였다. 그 와중에 가만히 귀를 기울이면 혈관을 세차게 흐르는 혈류의 소리가 들릴 것 같기도 했다. 그렇게 많이 먹어댔는데 아주 쌩쌩 잘 내달리는 것을 보아하니 혈관이 깨끗한 모양이다, 동맥경화 걱정은 안 해도 되겠구나, 역시 잘먹는게 장수 비결이지……. 피가 도니 뒷덜미부터 시작해 얼굴도 후끈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어쩐지 입이 마르는 것 같아 마른 침을 꿀꺽 삼키고, 입술이 마르는 것 같아 입술을 살짝 말아 씹었다. 이 신체적인 반응에 이름이 있다면 ‘흥분’이라는 것에 가깝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마틴은 주먹을 꼭 쥐었다. 그래. 이 흥분은 백호가 가져다준 감히 예상치도 못할 미래의 엄청난 행운에 대한 기대이며, 그러한 기대에 대한 고양감이다. 틀림없다. 그리 생각하면서도 어째 힘이 들어간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손등에서 혈관이 작게 불거져 나올 정도였다. 마틴은 평화에 푹 절어 있던 심장이 주책맞게 뛰는 것이 낯선 모양인지, 숨을 고르기 위해 가슴을 폈다. 숨을 크게 들이 마시고, 후우, 내쉬고, 들이 마시고, 내쉬고. 두번째 호흡을 길게 내뱉은 다음에는 잠시 숨을 참았다.
-쿵쿵쿵
다시 한 번 울리는 노크소리에, 마틴은 하랑의 말로 갑자기 접신이라는 것을 한 사람처럼 눈을 확 치켜떴다. 몸을 휙 돌렸다. 문고리를 잡아 성난 사람처럼 확 꺾어 문을 활짝 열었다. 마틴 인생에서 가장 날랜 순간이었다.
아니, 그러니까 동물원 우리 안에서 늘어지게 잠이나 자고 있어야 할 멸종위기종 호랑이가 왜 우리집 앞에 있는 겁니까, 아냐, 이건 내가 잘못 본……!
휙! 소란스레 문이 열리자 빗소리가 다시 시끄럽게 쏟아졌다. 솨아아아, 빗소리에 물비린내 실은 바람과 함께 현실감이 우두두두 쏟아지는데 도저히 현실 같지가 않았다. 문 앞에는 비에 쫄딱 젖은 허연 백호 한마리가 다른 곳에 갈 생각 없는 것처럼 서있었다.
“잘못…잘못 찾아…….”
흥분한 기색을 숨기기도, 말을 차마 매듭짓기도 쉽지 않았다. 대체 영문을 알 수 없어 씨근덕거리는 마틴 챌피와는 다르게, 백호는 꼭 중국 출장을 간 누구와 닮은 흐트러짐 없는 눈빛을 하고선 마틴을 빤히 올려다보고 있었다. 사실 호랑이만이 자신을 보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무엇인가 푸드덕 거리는 것을 느낀 마틴은 그제서야 자신을 올려다보는 다른 눈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까는 호랑이의 임팩트가 너무 커서 미처 놀랐던 몰랐던 것일까. 호랑이는 겨우 팔뚝만도 되지 않을 것 같은 까만 새끼돼지의 목덜미 물고 서 있었다. 목덜미의 빨간 머플러로 보이는 것을 물려, 얌전히 대롱대롱 매달려 있던 새끼돼지는 마틴과 호랑이의 되도 않는 눈싸움을 보고 대체 뭐하냐는 듯 아동바동 몸부림을 치며 울었다.
“꾸이꾸이!”
2.
“망할 사부!”
하랑은 눈앞에 펼쳐진 무수히 많은 샘을 보고는 티엔에게 버럭 화를 내었고, 티엔은 그런 하랑은 상관도 않는다는 듯 샘에 꽂힌 대나무 위로 풀쩍 뛰어 올라갔다. 아슬아슬한 대나무 하나 위에 한 발로 딛고 서서 여유롭게 팔짱까지 끼고 있는 모습이 어찌나 여유롭고 편안해 보이는지, 사실 중국인들은 평소에 모두 이런 수련을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아시아 지역의 능력자를 스카우트한다는 명목으로 티엔의 출장길에 따라나선 하랑이었다. 낯선 나라로 와 난생 처음 보는 가지각색의 머리색을 한 색목인들만 보다, 검은 머리의 검은 눈을 한 사람들이 지천인 곳으로 왔더니, 그래도 익숙한 기분에 비록 조선은 아니었지만 어째 마음이 편안하고 고향의 향수가 채워지는 느낌이 들었었다. 허나, 그것도 잠시였다. 아시아지부 스카우터라는 티엔 정이라는 이 자는 과연 스카우트 하러 온 것인지 스카우트를 핑계로 혹독한 수련을 시키러 온 것인지! 티엔은 여행의 들뜸도, 모처럼의 향수에 젖어 있는 것도 허락하지 않으려는 것처럼 하랑을 고되게 채찍질했다. 전지훈련 온것마냥 포트레너드에서보다 더 힘들어진 체력단련은 물론이요, 능력자와 만나면 테스트라는 명목으로 하랑과 대련하게 시켰고, 능력자가 아닌 재야의 무림고수를 만나면 능력을 쓰지 않고 대련하게 시켰다. 하랑은 이건 스카우트 명목으로 온 출장에서 직무유기 하는 꼴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했다. 대련이 그렇게 좋으면 사부가 하시든가! 아무리 빽빽 대봐도 소용이 없었다.
그렇게 고된 아시아의 출장이 겨우 나흘을 남겨두었던 어느날 밤. 잠들기 전 티엔이 선심쓰듯 말해주었다.
‘너를 위해 특별히 준비한 것이 있다.’
‘어? 뭔데뭔데?’
‘특별한 것은 입 밖으로 내는 순간 가치가 떨어지는 법이지.’
두근두근했다. 고작 3일이었다. 마지막 3일만큼은 편히 놀고, 관광도 좀 하게 해 줄 생각인가부다! 사람이 갑갑한 구석만 있는 줄 알았더니 알게 모르게 귀여운 구석도 있단 말이야, 보상이 있는 줄 알았으면 진작에 열심히 했지이! 중국은 땅덩어리가 넓고 사람도 많은 만큼, 볼 것도 많고 먹을 것도 많은 나라였다. 하랑은 드디어 제대로 된 여행을 하게 될 것이란 기대감에 부풀어 밤새 제대로 잠들지도 못했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지난날이 궁금해 오늘은 어떤 사건이 날 부를까…….
그렇게 의심 없이 티엔의 뒤를 쭐래쭐래 따라왔다. 산길을 아무리 걸어도 걸어도 도착하지 않을 때, 그때 의심을 했어야 했는데. 분명 티엔의 뒤를 따라 간 것은 자신인데, 앞서나가던 티엔에게 뒷통수를 맞았다. 온천의 입구로 믿어 의심치 않는 곳에는 가이드가 기다렸다는 듯 서 있었다.
‘전설의 수행장 주천향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전설의 수행자앙? 나를 위해? 이게 선물이야? 이 땅 사주는 거야? 나 부동산 부자로 만들어줄 거야? 아니잖아! 결국 또 수련이잖아!!”
“특별히 준비한 것이 있다 했지, 선물이라고 한 적 없다.”
“얼씨구, 말은 잘하지! 그냥 더 빡센 수련장에 갈 것이니 각오해라고 말하지 그랬수?!”
“아아. 지금 말하지, 각오하도록. 내가 직접 상대해 주겠다.”
“옘병! 혼자 열심히 대련하소! 김나는 것 보니 온천이 맞긴 한 모양인데, 난 여기서 몸 좀 풀어야겠수다!”
하랑은 소리를 빽 지르곤 씩씩대며 옷을 훌렁훌렁 벗어 재꼈다. 눈 깜빡할 사이에 속곳만 겨우 남겨둔 하랑은 어디로 들어갈까 성급하게 휙휙 살펴보다 탕이 거기가 다 거기겠지, “에라이!” 그냥 제 눈앞에 보이는 샘으로 달려들듯 풍덩 뛰어 들어갔다. 어찌나 요란하게 뛰어 들어갔는지 물보라가 높이 치솟았고, 물은 제법 깊었던 모양인지 하랑은 머리꼭지도 보이지 않게 푹 잠겼다. 요란한 소란 뒤에 잔망스런 정적이 찾아왔다. 보글보글, 물거품이 올라오는 것을 보고 티엔은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저렇게 성급해서는……. 저것을 어린 청년의 혈기라고 해야할지, 치기라고 해야할지, 티엔은 한심하다는 듯 고개를 낮게 저으며 혀를 찼다. 쯧쯔. 그때 숨이 찬 모양인지 하랑이 수면 위로 푸핫, 솟아 올라왔다.
아니, 저 모양새는 하랑이 아니라. 티엔이 뜬금없이 물 위로 솟아올라 살려달라는 듯 네 다리로 정신없이 아동바동 장구치는 새끼돼지를 보고 당환한 듯 미간을 찌푸렸다. 그때 저 아래에서 박수소리가 들렸다. 호오! 흥미로운 감탄사가 들려오는 곳을 향해 내려다보았더니, 아직까지 있는지도 몰랐던 온천 입구에서부터 둘을 안내해준 가이드가 저 밑에서 티엔을 올려다보며 설명했다.
“흑돈익천이군요!”
“흑돈익천?”
“주천향의 100개가 넘는 샘에는 각각 비극적인 전설과 전설이 있습죠. 저 댕기머리 소년이 빠진 곳은 흑돈익천! 1200년 전에 검은 새끼돼지가 빠져 죽은 샘으로, 그곳에 빠진 자는 새끼돼지로 변하는 저주에 걸리고 맙니다!”
이 무슨 말도 되지 않는……. 얼척없는 가이드의 설명에 티엔이 허, 하고 기가 찬 한숨을 내쉬는 동안 흑돈익천의 새끼돼지—이하랑—은 열심히 물장구쳐 도달한 샘의 가장자리를 붙잡아 색색 가쁜 숨을 내쉬었다. 짜리몽땅한 몸을 부르르 털고, 갑자기 물에 빠진 탓에 물이 들어간 코가 매운 탓인지 눈물로 두 눈을 촉촉히 적시고 연신 코를 킁킁대던 하랑은 저 높이 대나무에 서있는 티엔을 째릿, 노려보았다. 티엔은 성급함이 화를 부를 줄 알았다는 듯 콧방귀를 뀌었다. 흥.
“수련 부족이군, 이하랑.”
돼지로 변한 것도 억울해 죽겠는데 저 망할 사부가……! 하랑도, 티엔도 그때 알았다. 돼지의 근력은 생각보다 상당히 뛰어나고, 그 민첩함이 제법 날렵하여 방심하면 봉변을 당하기 십상이라는 것을. 아득, 엄니를 간 하랑은 오기로 티엔을 향해 팟, 뛰어올랐다. 돼지는 섬광처럼 튀어올라 갑자기 시야에서 사라졌다. 어디로 사라진 거지? 티엔이 대응하기 위해 몸을 낮추어 자세를 잡았으나 그때는 이미 새끼돼지가 그의 얼굴로 순식간에 찰싹 붙은 다음이었다. 예상치 못한 민첩함과 가려진 시야에 티엔은 답지않게 당황했고, 그 틈을 타 얼굴을 마구잡이로 할퀴었더니 티엔은 속수무책으로 뒤로 넘어가고 말았다. 대나무를 딛고 섰던 발이 떨어지고, 풍덩! 내가 이겼지롱, 바보 사부!
티엔이 휙, 넘어가고 난 뒤 공중에서 한 바퀴 빙그르르 회전한 하랑은, 직전까지 티엔이 버티고 서있었던 좁은 대나무 끝에 네 발을 모아 착지했다. 하랑은 티엔이 빠진 샘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과연 티엔은 무엇으로 변하는 저주에 걸려 나타날까. 보신이나 하게 닭으로 변하는 저주에나 걸려버리라지!! 얼마나 하찮은 저주에 걸려 나타날까, 어쩐지 기대되는 마음까지 들어 금방이라도 빠져버릴 듯 물거품 끓고 있는 샘을 뚫어져라 보고 있자니, 드디어 수면 위로 티엔이 불쑥 솟아올랐다. 설명 못해 죽은 귀신이 들러붙었는지, 가이드가 말했다.
“백호인천이군요! 1800년 전에 백호가 빠져 죽은 샘으로, 그곳에 빠진 자는 백호로 변하는 저주에 걸리고 맙니다!”
물 위에 우뚝 솟은 웅장한 백호 한 마리가 몸을 떨어 후드드 물기를 털어냈다. 어디서 날아온 것인지 댓잎 하나가 호랑이의 콧잔등 위로 떨어지자, 새끼돼지 이하랑은 분노로 절규했다.
“꾸이!!(왜!!)”
3.
차라리, 포트레너드에 돌아왔더니 갑자기 쏟아지기 시작한 비를 피하기 위해 들렀다면 이해할 수 있었다. 호랑이 손, 돼지 손으로는 차마 자기 집 문을 열 수가 없어서 급한대로 오셨다?
“그걸 지금 저보고 믿으라구요?”
따뜻한 물에 샤워를 마치고, 수건으로 머리를 털며 부엌으로 가는 티엔에게 마틴이 말했다. 어이가 없었다. 믿을 수 있는 소리를 해야지! 전설의 수행장에 갔다가, 물에 빠져서, 찬물을 뒤집어쓰면 백호로 새끼돼지로 변하는 저주에 걸려, 다시 사람으로 변하려면 따뜻한 물을 뒤집어 써야 한다는 말을 대체 누가 믿을 수 있겠는가? 게다가 그 둘은 아직 순수를 버리지 못한 마틴의 동화 속 저주에 대한 로망까지 부수고 말았다. 으레 저주라는 것은 죽음의 이름에 가깝고, 저주를 풀기 위해선 왕자님의 키스가 필요하지 않던가. 공주의 저주를 풀어줄 백마 탄 왕자님이 한때의 장래희망이었던 마틴은 저도 모르게 잠들듯 눈 감은 티엔과 하랑의 입술에 입 맞추는 자신을 떠올려보았다. ……. 상상력이 좋지 않은 곳을 스쳤다. 마틴 챌피는 질색한 표정을 지었다. 따뜻한 물이면 된다는 사실이 그렇게 다행일 수가 없었다. 끔찍하군요, 두 사람이 공주가 아니어서 다행입니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저주에 걸리는 방법이 뭐 이렇게 보잘 것 없고, 저주를 푸는 방법은 왜 이렇게 하찮은데?
티엔은 꼭 자신의 집인 것처럼 여상스레 마틴의 냉장고 문을 열고, 물을 꺼내, 찬장을 열고, 컵을 꺼내, 물을 따라 마셨다. 꿀꺽꿀꺽 두 모금을 삼켜낸 티엔이 손등으로 입가의 물을 훔치고선 혼잣말하듯 나지막이 읊조렸다.
“보고도 못 믿겠다…….”
벌컥! 욕실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티엔과 마틴이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새끼 흑돼지가 아닌 나체의 하랑이 작게 연 욕실 문틈 새로 고개만 빼꼼히 내밀었다. 하랑은 제 등 뒤에서부터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따뜻하고 포근한 김을 배경삼아 말했다.
“마틴형! 나 가운하고 팬티 떨어져서 물에 젖었어! 새 거 좀 빌려줘!”
저 천둥벌거숭이가 진짜 뻔뻔해도 정도가 있지……, 마틴이 이미 다 마셔 비어버린 찻잔을 괜히 한 번 더 입에 물고, 차를 마시는 척 침만 꿀꺼거 삼켰다가, 찻잔을 이로 콱 깨물었다. 혹여나 다기가 금이 가고 깨질 것 같아서 그리 오래 물고 있지는 못했다. 어쩔 수 있나, 아래 위로 홀딱 벗은 채로 자신의 집을 돌아다니게 둘 수는 없어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무튼 손이 많이 간다니까, 내가 저 나이 때에는……하고 괜히 툴툴거리며 가운과 속옷을 챙기러 움직이러 갈 때였다.
“꾸이!!”
돼지가 비명 지르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마틴이 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돼지 소리가 나는 곳을 돌아보았다. 욕실 문 앞에는 저가 내어주었던 가운을 두른 티엔이 팔을 뻗어 물컵을 뒤집은 채로 서 있었고, 그 아래에 까만 새끼돼지가 차갑다는 듯 온 몸을 부르르 떨어 물기를 털어냈다. 잔뜩 화가 난 모양인지 “꾸이꾸이!” 성난 소리를 내며 티엔의 발목을 앙앙 물어대는데, 돼지가 있던 자리에 아마 티엔이 엎어뜨린 것으로 보인 찬 물이 흥건했다. 제 발목을 무는 돼지의 이빨 따위는 간지럽다는 듯 티엔은 무심하게 팔짱을 끼고, 어깨를 벽에 대어 삐뚜름하게 섰다. 제 발 아래를 보라는 듯 작게 눈짓과 턱짓을 하곤 무감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믿겠나?”
사제가 왜 유치한 것도 닮아가는 거야……. 머리가 지끈거렸다. 아. 그래도 매일같이 마주하던 두 사람이 사라진 빈자리가 허전했던 것 같기도 하다, 보고 싶긴 하네, 라고 생각했었던가. 내가 미쳤었구나. 그것이 실수임이 틀림없다 생각하며 마틴은 절망하듯 한 손으로 눈가를 턱, 짚었다.
4.
겨우 두 사람 사라졌다가, 두 사람 돌아왔을 뿐이었다. 재단은 눈에 띄게 분주해지거나 활기를 띄거나 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유모를 안정감이 생겼다. 마틴 챌피의 완벽한 평화가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안정감이 찾아왔다니, 우스운 일이었다. 뭐, 당연한 거죠. 마틴은 크게 개의치 않았다. 원래 우리 애가 눈앞에 보이지 않으면 어디 다치지는 않을까, 어디 가서 나쁜 친구들이랑 어울리지 않을까, 어디 가서 사고 치지는 않을까 불안하고 걱정 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좋든 싫든 언제고 제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다면 일단 안심은 되니까. 하지만 그것을 하랑이라면 몰라도 티엔에게도 가져다 붙일 수 있는 이야기인가, 하고 생각하면 의문은 들었다. 그가 어디 가서 사고를 친다거나, 나쁜 물이 들어 올 타입은 한 치의 의심할 여지도 없이 아니었으므로. 음……. 생각은 많아봐야 좋을 것이 없으므로, 그냥 그렇다고 결론짓기로 했다. 그가 어디서 큰 부상을 입어온다거나 하면 조금 분하기는 하다만은 그랑플럼의 전력에도 큰 손해이기 때문이었다. 당신 걱정이 아니라, 재단을 걱정하는 겁니다. 그렇게 아무도 따지지 않은 질문에 혼자 대답했다. 그리고 이것 보세요. 나 없으니까 칠칠맞게 일도 제대로 처리 못하지 않습니까? 이렇게 허술하면서 어른 행세는……. 마틴은 서류를 들고 복도를 가로질러 티엔의 집무실로 향했다. 어떤 사소한 업무도 완벽하게 처리하던 티엔이, 사소하고도 중요한 하나를 빠뜨렸기 때문이었다. 출장 보고서에 티엔의 서명이 빠져있었다.
——.
음? 괜히 티엔이 작성한 보고서를 한 글자 한 글자 읽으며 복도를 걷고 있자니, 어디서 발생한 것인지 짧고 부산스러운 소리가 적막한 복도에 메아리처럼 울렸다. 마틴은 예상치 못한 소란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어올렸다. 티엔의 집무실이 이렇게 가까웠던가, 아니면 내가 좀 빨리 걸었던가. 티엔의 집무실이 어느덧 겨우 몇 발짝 앞에 있었다. 웬일인지는 몰라도 그의 집무실 문이 조금 열려있었던 덕분에 소란의 근원지가 어디인지는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티엔이 열일곱 먹은 청소년처럼 왕성한 혈기를 주체 하지 못할 사람은 아니었기에, 아무래도 하랑 때문이겠거니. 거기까지 생각이 이르자 마틴의 짐작이 틀리 않았다고 증명이라도 해주듯 문 틈 새로 까만 아기돼지가 총알처럼 팟, 하고 튀어나왔다. 문 앞에서 주위를 샥샥, 잽싸게 둘러보던 아기돼지는 마틴을 보고서는 다소 놀란 듯 멈칫하더니 “꿀.” 복도 반대편으로 부산스레 내달렸다. 빠르다……. 씰룩이며 달려가는 그 뒷모습에 총총대는 소리가 글씨가 되어 스타카토처럼 튀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혼자서 저 모습으로 재단 밖으로 나가진 않을 테지. 마틴은 별 일 아니라는 듯 아기돼지, 그러니까 이하랑이 달려 나간 자리를 보며 건성으로 노크했다. 똑똑. 노크는 그저 의무사항이었던 것처럼 대답을 듣지도 않고 집무실의 문을 잡았다. 열었다.
“저기, 티엔씨. 여기 서류에 싸인이…….”
마틴은 집무실 문은 닫았으나, 말을 끝맺지는 못했다. 티엔의 집무실에 커다란 백호 한 마리가 네발로 서있었기 때문이었다. 문이 열리고 마틴이 들어오는 것을 확인한 호랑이는 인사를 건네듯이 마틴의 눈을 빤히 보며 두어번 눈을 끔뻑 거리다, 커다란 머리를 흔들었다. 창가로 들어오는 빛에 후두두 튄 물방울이 반짝반짝 비치는 것을 보니 이제 막 호랑이로 변한 참이었던 모양이다. 어쩐지 조금 전에 하랑이 도망가듯 달려가는 것을 보아하니, 제 사부를 호랑이 꼴로 만든 것이 그 잔망스런 아기 돼지인 모양이었다.
백호는—티엔 정—마틴의 방문에 무슨 일이냐고 되묻듯, 마틴을 향해 네 발로 느릿느릿 걸어왔다. 괜히 동양에서 영물취급 받는 것이 아닌 모양이네요. 기백에 압도당했다. 포장하자면 그런 것이고 그저 겁을 먹어 조금 얼어붙었다는 것이다. 마틴은 저도 모르게 뒤로 짐짓 뒷걸음질 쳤다. 하지만 쿵, 등에 닿는 것이 조금 전에 자신의 손으로 야무지게 닫아 놓은 집무실 문이었다. 저기요 그쪽이 티엔씨인 것도 알겠고, 백호인 것도 알겠는데 맹수를 흔히 접해볼 수 없는 일반인에겐 이거 굉장히 위협적인 그런…거거든요, 하하……. 그 말이 나오지 않아 숨만 흡 들이 마신 채 참았다. 갑자기 평소에도 없던 호기심이 생기셨는지, 백호가 슬그머니 등을 세우더니 마틴의 얼굴 바로 앞까지 고개를 쑥 들이밀었다. 더 뒤로 물러설 곳이 없어 턱만 바짝 당겼다. 맹수의 두 눈이 좀체 뒤로 물러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저기, 티엔씨, 너무 가까운데……. 숨을 슬금슬금 새어 보내도 숨이 호랑이의 눈가나 콧잔등을 간지럽힐 것 같아 그마저도 하지 못했다. 떨어지세요, 좀……. 말을 하면 될 것을 입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숨을 마지막으로 꿀꺽, 삼키며 눈을 질끈 감았다. 얼굴에 화끈 열이 오르고 땀까지 나는 것 같았다. 주먹을 꾹 쥐었다. 오른손에 들고 있었던 서류 종이가 파스락, 구겨지는 소리가 났다. 뾰족하게 선 백호의 귀가 반응하듯 쫑긋 움직였다. 마틴의 바로 목전까지 다가왔던 백호가 마틴의 손을 흘긋 내려다보더니 이내 자세를 낮추었다.
이제 좀 떨어지려나. 그것도 아니었다. 북슬북슬한 머리가 허리춤에 닿았다. 음? 마틴이 실눈을 뜨고서는 허리춤을 내려다보았다.
백호는 마틴의 몸에 제 뺨과 머리를 부비었다. 아주 느릿하게, 나는 너를 해칠 생각이 없으니 겁먹지 말라고 말하는 것처럼. 서두르지 않는 그 모습에 마틴은 눈을 깜빡이며 저도 모르게 탄성을 내뱉었다. 아. 낮게 흘리는 목소리에 백호는 마틴의 긴장이 조금 풀어졌다 생각한 모양인지 혀를 내밀었다. 곧 뜨겁고 마르게 젖은 혀가 마틴의 손등을 훑고 지나갔다. 삭, 삭, 기분이 좋아질 것 같은 소리마저 났다. 생각지도 못한 온도와 습기에 마틴은 다시 흠칫하였으나, 그것으로 잠시였다. 고개를 천천히 끄덕대며 다정히 핥아대는 모습과 몸에 닿는 온도가 낯설지 않은 까닭이었다. 마틴은 어렵지 않게 언젠가 안아 보았던 애완고양이가 자신에게 친근함을 표하며 애교를 부리던 모습을 떠올렸다. 손을 내밀어 보드라운 턱을 간질어주면 기분 좋은 듯 고롱고롱 소리를 내곤 했지. 그리고는 이 호랑이가 티엔이라는 것도 잊고 생각해 버리고 만다. 귀여워라. 두 눈이 나른한 호를 그리며 휘었다. 어쩐지 간지러운 기분도 들어 어깨를 살짝 움츠렸다. 조금 전까지 집어먹었던 겁이 언제 그랬냐는 듯 차분히 누그러들었다.
마틴은 참았던 숨을 찬찬히 고르었다. 후우우……. 호흡을 참았다가 다시 시작한 탓에 모자란 산소를 내놓으라고 성을 내기라도 하듯 심장이 빨리 뛰었다. 두근두근. 그 소리가 귓가에 선명했다. 너무 커서 티엔에게도 들리지 않을까 싶었지만 들켜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그저 숨이 찰뿐이든, 겁이 나는 것이든, 설레는 것이든, 심장 고동의 소리는 다 똑같았다. 그리고 이것은 단지 숨을 참았기 때문에 따라오는 생리적 반응이며, 심리적 요인이라면 호기심 때문이기에 꿀릴 것도 없다, 라고 생각했다. 어느새 동물원으로 소풍 나온 어린애가 된 마냥 들뜬 마틴은 백호가 한참 핥던 오른손을 들어올렸다. 자연스레 호랑이의 시선이 손을 따라 갔고, 마틴은 손가락을 가지런히 모으고선 “잠깐만요.” 백호에게 손바닥을 내어보였다. 백호는 그것이 이제 괜찮으니 거리를 내어달라는 말임을 알아듣고는 뒤로 두어걸음 물러섰다.
“잘했어요.”
마틴이 해사하게 웃으며 손을 뻗어 백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 모습이 마틴의 성정을 고스란히 보여주기라도 하듯 너무 다정하여, 낯선 맹수가 아니라 오래 알고 지내 사랑스럽고 애틋한 애완동물을 대하는 것 같았다.
사실 현재 호랑이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그 알맹이는 사람인 티엔으로서는, 누군가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것이 마지막이 언제였더라 돌이켜보면 기억 밖의 일일 정도로 까마득한 예전의 일이었다. 희미한 기억을 억지로 긁어내면 아주 어릴 적엔 이렇게 토닥여주며 잘했다, 칭찬해주는 그 다정함에 목이 말라 무얼 하든 더 열심히 했었던 적이 있었던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말 그대로 아주 오랜 옛날의 일일 뿐, 이 나이가 되어 누군가에게 머리를 내어 줄줄은 몰랐는데. 애 취급이라니 달갑지 않긴 하지만서도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그냥 이대로 둬 볼까. 백호인천의 저주에 거렸더니, 짐승으로 변하면 짐승의 습성마저 닮아지는 모양이었다. 마틴의 손길에 제 머리를 맡기고 저도 모르게 털이 복슬복슬 난 손등을 삭삭 핥아 올리는 동안 마틴이 손을 거두었다. 손이 빈 자리에 괜히 허전한 기분이 들어 고개를 들어보았더니, 마틴이 자신의 앞에서 한 무릎은 세우고 다른 한 무릎은 꿇어앉고는 동화 속 공주님에게 청혼하듯 손을 내밀었다.
“손.”
“…….”
“자아, 손!”
“…….”
“……빵야?”
손가락으로 총질은 왜 하는 것인가. 애 취급이 아니라, 애완동물 취급을 당하고 있었다. 이건 뭐, 답이 없군.
5.
그랑플럼의 점심시간이었다. 언제나처럼 별 특별할 것 없이 조용하고 단조로운 식사시간에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어쩐 일로 티엔이었다.
“돼지.”
빠직. 이마에 십十자 모양으로 핏줄이 튀어나오는 것 같았다. 그랑플럼에서 잠깐이나마 과체중이었던 과거가 있고, 잘먹는 것이 잘사는 것이라 몸소 증명해 내기라도 하려는 듯 마틴은 먹는 것을 좋아했다. 그런 그에게 붙은 별칭은 바로 ‘돼지’였다. 바보가 아닌 이상, 아무리 애정이 듬뿍 묻어있다 해도 돼지라는 별명을 칭찬으로 쓰지 않는다는 것쯤은 안다. 놀리기 용이지, 심지어 티엔 정이 부르는 저 호칭에는 애정조차 없다! 바보가 아닌 마틴 챌피는 스푼을 탕, 내려놓았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왜 밥 먹을 때 건드리는…….
“응? 왜?”
마틴이 무어라 입을 달싹이기도 전에 하랑이 우물우물 거리던 것을 꿀꺽 삼키고선 대답했다. 반응이 날 때부터 이름이 돼지여서, 그저 이름을 불렸을 뿐인 것처럼 여상했다. 아, 하긴. 하랑은 흑돈익천에 빠진 이후로 찬물에 맞으면 진짜 돼지가 되는 저주에 걸렸지. 비유적 돼지가 낄 자리가 아니었나보다. 지극히 평범한 하랑의 반응에 발끈했던 것이 괜히 머쓱해진 마틴은 다시 슬그머니 스푼을 쥐어들었다.
“조선에서는 돼지가 우는 소리를 뭐라고 하나.”
“뜬금없네. 음, 한국에서는 꿀꿀[꿀꿀] 이라고 해. 중국은?”
“哼哼[hēngheng]”
“헝헝? 푸핫! 그게 뭐야~ 꼭 감기 걸려서 코 꽉 막힌 소리 같잖아. 아, 마틴형. 여기말로 돼지는 어떻게 울어?”
대화 주제가 왠지 모르게 심기에 거슬리는 데 자의식 과잉이겠지. 아무 꿍꿍이속 없다는 듯 평범하게 오가는 대화가, 오히려 너무 철저하게 꿍꿍이속을 숨기는 것 같지만 생각이 너무 많은 거겠지. 하긴, 이렇게까지 유치하게 굴 사람들은 아니니까. 마틴은 태평한 척 대답했다.
“oink oink[ɔɪŋk ɔɪŋk]라고 해요.”
“…….”
“…….”
물어 봐놓고는 왜 아무런 반응이 없는 거지. 묘한 위화감에 마틴이 먹는 것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보았더니 하랑이 얼굴이 시뻘개진 채로 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는 웃음을 참느라 애를 쓰고 있었다. 풉-. 뭐야, 설마 이거 진짜 설계였어요? 온몸이 순식간에 뜨거워졌다. 당했다. 귀가 뜨거워 녹아버릴 것 같았다.
“잘하잖아? 아, 마틴형이 제일 설득력 있는 것 같아. 사부 나도 저래?”
“장난이 심하군, 하랑.”
티엔이 하랑을 나무라는 것으로 보아서는, 둘이 짜고 친 판은 아닌 것 같았다. 어쩐 일로 티엔씨가 내 편을 들어 주다니, 역시 어른은 어른인 모양이었다. 어쩌면 조금 감동해 버릴지도……
까지 생각한 순간 봐 버리고 말았다. 저기 높은 하늘 꼭대기에 올라가 내려다보며 비웃기라도 하듯 히죽, 올라가는 입꼬리를.
진짜 최악입니다!
돼지 소리는 그 후로도 멈추지 않았다. 저 뒤에서 티엔이 “돼지!”라고 부르기에 틀림없이 자신이라고 생각하여 뒤를 돌아보면 또 무슨 잘못을 한 것인지 하랑이 열심히 도망가고 있었다. 하랑과 무엇인가 할 얘기가 있어 마주 서서 얘기를 하고 있으면 또 티엔이 “돼지.”라고 점잖게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어쩐지 또 뜨끔하여 째려보듯 쳐다보면 하랑이 지친다는 듯 뒷머리를 긁적이며 “아, 또 수련이야…….” 하고 털레털레 걸어가기도 했다. 일부러 그러는 것인지 아니면 정말로 그저 하랑을 애칭으로 부르는 것인지, 어떤 쪽으로든 괜히 의식하고 발끈하게 되어버려 지는 느낌이라 약이 올랐다. 조금 더 두고 보면 알겠죠. 그런 곳에 신경을 쓰는 것보다 자신의 일이 더 중요했다. 마틴은 불필요한 위화감을 지우듯 머리 위로 손부채질을 했다. 그렇게 잡생각을 멀리 멀리 보냈는데, 티엔의 “돼지.”라고 부르는 소리는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
“돼지.”
타이밍이 말해주고 있었다. 사실 이때까지 꼭 마틴더러 들으라는 듯 하랑을 “돼지”라고 호명한 것은, 아주 분명하고 유치한 이유가 있었다는 것을. 그러니까, 먹을 땐 개도 안 건드린댔다니까요? 조금 전 주화상점에 들른 아가씨가 주고 간 초콜릿을 먹으려고 이제 막 입을 벌린 참이었다. 마틴은 내가 선물 받은 초콜릿 내가 먹겠다는데, 내 살 내가 찌우겠다는데 댁이 무슨 상관이냐는 듯 오기로 티엔을 노려보며 초콜릿을 와작 씹었다.
“저기요, 티엔씨. 생각해봤는데…….”
“꾸이?”
“?”
친근한 돼지소리에 마틴이 발치를 내려다 보았다. 대체 언제 숨은 것인지 아기돼지로 변한 하랑이 자신의 종아리 뒤에 숨어 고개만 빠끔 내밀고 있었다. 이 사람들이 진짜……. 속이 부글부글 끓고 꽉 쥔 주먹이 덜덜덜덜 울었다. 하랑은 아마 또 무슨 사고를 쳤던 모양인지 파팟! 그 길로 다시 잽싸게 도망갔다. 티엔은 믿을 수 없는 돼지의 근력에 혀를 쯧 찼다. 날래게 도망가는 돼지를 쫓아가려 할 때에, 금방이라도 달려 나갈 것 같은 티엔의 옷을 마틴이 텁썩 붙잡았다. 진짜로 돼지가 있었든 없었든 묻고 지나갈 것이었다.
“일부러 저 들으라고 그러시는 거죠?”
“뭐가 말인가.”
“돼지돼지 하고 부르는 거 말입니다. 설마 그때 제가 애완동물 취급 한번 했기로서니,”
“잠깐.”
마틴이 분을 꾹꾹 눌러 담아 차분하게 말하는 것을 끊은 티엔이 불쑥 손을 내밀었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감촉이 뺨에 닿았다. 무엇을 하다 온 것인지 모르겠으나 손은 딱 기분 좋을 만큼의 한기를 품고 있었다. 티엔의 엄지가 마틴 입가를 쓱 문질렀다. 어쩐지 두근거리는 이 느낌은 예상치 못한 스킨십이라는 기습공격에 대한 당혹감과, 직전에 초콜릿을 통해 섭취한 카페인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초콜릿이 묻었다.”
“이런 건 그냥 직접 말 해 주셔도…….”
하필, 칠칠맞게. 마틴이 티엔의 손을 툭 밀치고는 손등으로 입가를 슥슥 문질러 훔쳤다. 티엔이 이어 말했다.
“요즘 스트레스 받을 일이 많았나보군. 카페인은 피로감과 스트레스를 덜어 주고 집중력을 상승시키며, 일시적으로 기분을 좋아지게 만들지. 좋은 선택이다.”
“네, 뭐……감사합니다……?”
“하지만 초콜릿은 고열량 식품이자, 지방 함유량이 높으니 지나치게 먹으면 비만을 불러올 수 있다는 걸 잊지 말도록.”
마틴은 보았다. 그 말을 맺으며 씨익 올라가는 티엔의 한쪽 입꼬리를. 오잉크오잉크를 시켰던, 그때의 점심시간처럼!
“아직 하수로군. 돼지.”
정말!
6.
그 후로 티엔이 하랑을 가리키든 마틴을 가리키든, 티엔이 입에서 ‘돼지’라는 말이 나오면 마틴은 티엔을 호랑이가 아닌 고양이 취급 하는 것으로 응수했다.
돼지 한 번에 턱과
돼지 한 번에 머리와
돼지 한 번에 뺨과
돼지 한 번에 뒷목과,
돼지 한 번에 등꼬리, 등꼬리,
티엔씨, 나는 돼지 한 번에 고양이가 좋아하는 한 부위씩 만져봅니다.
/윤동주 - 별헤는밤
마틴은 티엔의 모습이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든, 호랑이의 모습을 하고 있든 가리지 않았다. 돼지 소리가 들릴 때 마다 티엔의 앞뒤로 쫓아가 등가 교환마냥 한 마디에 한 번씩 “응응, 그랬어요~.” 손을 뻗어 턱밑을 간질러주고,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뺨을 가벼이 문대어주고, 등허리를 쓸어 내려주었다. 심지어는 손목을 뒤로 젖혀 내밀어 “손!”하고 말하기도 했다.
티엔은 그런 마틴을 아무렇지도 않은 마냥 물쾌한 기색 없이 모두 받아주었고, 기꺼이 손도 내밀어 주었다. 어디 한번 계속 해봐. 마틴은 그런 티엔의 유치한 태평함에 “네네, 잘했어요~.” 다정한 미소와 칭찬으로 응수해주었다. 네, 어디 한번 계속 해 보겠습니다.
그러니 손잡고 쎄쎄쎄 하는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던 하랑으로서는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오, 둘이 부쩍 친해졌는걸.
7.
오후에 짧게 소나기가 쏟아졌다. 분명 우산을 들고 사람의 모습으로 나섰던 티엔은 백호의 모습이 되어 돌아왔다. 입에 물고 있는 우산을 내려다보며 마틴이 물었다. “설마 우산을 펴는 방법을 몰랐던 건 아니죠?” 그럴 리가. 비가 그친 후 우산을 접던 와중에 지나가던 자동차가 그새 고인 물웅덩이를 세게 밟고 지나간 탓에 튄 물을 맞았을 뿐이었다. 하지만 호랑이는 사람 말을 할 수 없어 그저 자신의 집무실을 향해 어슬렁어슬렁 걸어갔다. 겨우 그 정도 물에도 호랑이로 변하다니 진짜 쓸데없이 섬세한 저주였다.
-똑똑
“들어갈게요.”
허락하는 목소리는 없었지만, 마틴은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의 손에는 바싹 마른 수건과 이제 딱 알맞게 식은 더운물이 담긴 주전자가 들려있었다.
털은 언제 바싹 말린 것인지 느른하게 누워있던 커다란 백호는 인기척에 고개를 들어 올렸다가, 마틴인 것을 확인하자 가지런히 모은 앞발에 다시 턱을 뉘였다. 마틴은 그 거대한 호랑이의 앞으로 걸어가 무릎을 쭈그리고 앉았다. 무릎과 배 사이에 수건을 끼우고, 주전자는 바닥에 내려놓은 채로 호랑이의 머리에 손을 뻗었다. 손가락에 감기는 북슬북북슬한 털의 감촉이 기분 좋아 마틴은 옅게 미소 지었다. 호랑이는 이제 하나도 무섭지 않다. 이렇게 친근해서야 나중에 정말 길들여지지 않은 호랑이를 만나게 되면 습관처럼 손을 뻗게 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도 들었다만 이내 사그라들었다. 사람이 일평생 사는 동안 야생의 호랑이를 만날 확률이 얼마나 된다고. 희박한 확률을 뚫고 아주 재수없게 야생의 호랑이를 만난다고 해도, 그보다 더 희박한 확률을 뚫고 저주에 걸린 백호가 지켜주겠지 하는 근거 없는 믿음이 있는 까닭이었다.
“……설마 자요?”
흐음. 백호는 대답대신 숨을 길게 고르고 저 뒤의 꼬리를 팔랑였다. 어째서인지 무사태평한 그 모습에 마틴은 주머니를 뒤적여 회중시계를 꺼내보았다. 낮잠을 자기에는 조금 부족해 보이지만 점심시간이 아직 남아 있었다. 하긴, 요 며칠 무리했으니까 쉬는 시간 정도는 아무 생각 없이 쉬는 것도 좋겠죠. 마틴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문득 무엇인가 생각났는지 ‘아.’ 소리 없는 탄성을 내뱉었다. 어릴 적부터 커다란 동물을 키우면 해보고 싶었던 것이 이제 와서 문득 생각난 까닭이다.
마틴은 그의 단잠을 방해하지 않으려 조심조심 움직여 슬그머니 그의 옆에 누웠다. 들키지 않게 조심하던 것이 무색하게 인기척을 느낀 백호는 귀를 팔락였으나, 그것을 보지 못한 마틴은 매우 조심히 움직였다. 아. 마침내 백호의 배에 머리를 누이니 새하얀 털이 뺨을 간질였다. 따끈한 온도와 그 보드라움이 제법 기분 좋아 마틴은 깍지 낀 손을 배 위로 올리며 베시시 웃었다. 바람 부는 언덕의 잔디 위였으면 더 좋았겠지만, 이것도 제법 기분 좋네요.
무엇인가 배 위로 묵직하게 내려앉는 감각에 백호는 슬그머니 눈을 떴다. 더운물이 담긴 주전가자 눈에 들어왔다. 마틴이 조금 전에 자신의 코앞에 내려놓은 저 주전자를 앞발로 친다면, 쏟아지는 물에 백호는 다시 티엔이라는 사람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백호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을 선택했다.
마틴 챌피는 꼭 인간 티엔 정과는 딱 이만큼의 거리만큼만, 하고 정해놓은 선이 있는 사람처럼 굴었다. 그 선을 넘어가면 무슨 병이 옮기라도 할까 겁을 먹은 사람처럼 그 선과 거리를 필사적으로 사수했다. ‘적당한 관계’라고 이름 붙인 그 관계는 마틴과 다른 사람과의 감정적 거리와 비교한다면 ‘적당히’라는 이름이 어울리지 않게 멀었다. 능력이 가져다 준 껄끄럽고도 안락한 생활 속, 어느 날 갑자기 제 앞에 나타난 티엔 정은 마틴 챌피가 자신의 능력을 통제할 수 있게 된 이후 처음으로 나타난 통제 밖의 남자였고, 불안이라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틴 챌피는 지금처럼 백호의 모습을 한 티엔 정에게는, 백호가 진실로는 누구인지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그어버린 선을 지우고 거리를 좁혀 경계를 헐어버렸다. 알면서도, 지금처럼, 호랑이를 앞에 두고 겁도 없지, 아주 무방비하다 싶을 정도로.
얼마나 해도 좋은지, 어디까지 해도 좋은지. 모든 관계에 있어 우위에 있을 수밖에 없는 능력을 가진 그에게 얼만큼을 내어보여도 약자가 되지 않을 수 있는지. 주천향에서 저주에 걸린 이후 백호의 모습으로 변해 있노라면 그 거리를 가늠하기가 어려웠다. 마틴 챌피의 적당한 거리. 요즘들어 조금씩 안달이 난다. 백호인천이라는 샘의 진짜 저주는 이것이었나 보다.
‘무겁군.’
아직 채 잠에 들지 못했었는지, 갑자기 머릿속으로 흘러들어온 생각에 마틴이 눈을 번쩍 떴다. 마틴으로서는 처음으로 들어본 티엔 정의 생각이었다. 그 사실이 중요했으므로 무겁다는 말은 별로 중요한 것이 되지 못했다.
“? 잠깐, 티엔씨 방금 무슨 생각 했어요? 제가 들은 게 맞죠?”
두 눈만 깜빡깜빡. 마틴은 누운 채로 티엔에게 재촉하듯 물었지만, 티엔은 다시 자신의 마음을 읽는 것은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꼬리를 살랑 움직여 마틴의 배를 덮을 뿐이었다. 자라.
드디어 들었다.
8.
천방지축 어리둥절 빙글빙글 돌아가는 하랑의 하루! 노크도 없이 갑자기 요란하게 벌컥 열리는 집무실 문에 티엔은 고개를 들었다. 촤아!! 고개를 들자마자 시야에 보이는 것이 무엇인지 확인하기도 전에 차가운 무엇인가가 얼굴을 확 덮쳐왔다. 아주 순식간이었다. 당연하게도 티엔은 백호의 모습으로 변했고, 얼떨하게 물기를 털고 고개를 올려다보자 이번엔 머리 위로 무언가 쿵 떨어졌다. 꾸잉!! 아기돼지였다. 마틴이 그를 향해 던진 모양이었다. 마틴은 무어가 분한 듯 전에 본 적 없이 잔뜩 성을 내고 있었다. 아기돼지가 후다닥 아동바동 호랑이의 가슴팍으로 파고 들어가 꾸이꾸이, 잔뜩 겁먹은 소리를 냈다. 그 모습이 퍽이나 가련하다만 마틴이 화가 난 것으로 보아 하랑이 또 무슨 말썽을 저지른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보호자분께서 대체 교육을 어떻게 시키는 거예요! 하랑이 무슨 짓을 한 줄 알아요?!”
얼굴에 억울함이 가득 차있었다.
“오늘 글림듀의 명물 쥬쥬앙 베이커리가 마지막 영업을 하는 날이었어요, 시그니쳐 메뉴인 쥬쥬앙슈를 마지막으로 먹을 수 있는 기회였고, 심지어 그동안의 성은에 보답한다고 오늘 딱 하루만 반값에 판매를 했단 말입니다, 갑작스러운 그 소식에 저는 오늘 새벽 5시부터 줄서서 기다렸고, 세 개 남았던 그 슈크림빵을 겨우 사왔는데! 저 돼지가!! 말도 없이 싹 다 먹었다구요!!”
마틴이 숨도 쉬지 않고 그렇게 다다다 쏟아 부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너무 갑작스레 맞이한 상황이라 그런지 아직도 어리둥절함이 가시지 않는데, 마틴이 저를 향해 다짜고짜 찬 물을 퍼부은 이유눈 알 것 같았다. 화는 나서 죽을 것 같은데 어디다가 억울함은 토로해야겠고, 그런데 본인이 생각해도 화를 내기에 너무 사소해서 한심한 소리를 들을까봐 아예 원천차단 한 모양이었다. 저 분노의 원인이 보잘 것 없든 그렇지 않든 나무랄 생각이 없었던 백호는 제 품에 깊숙이 파고든 새끼돼지를 보았다. 얼굴을 폭 파묻은 탓에 앙증맞은 엉덩이와 꼬리가 달달 떨리는 모습만 보였다.
“진짜 돼지돼지 소리 몇 번 받아 줬다고 누구처럼 진짜 돼지인줄 아나! 달라고 하면 안 줄 사람 같아요, 제가?!”
마틴은 그렇게 말을 맺자마자 쌩하니 티엔의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어찌나 짧고 강렬했던지, 태풍이 지나간 것이 아니라 바로 코앞에서 천둥번개가 치고 나간 것 같았다. 정적이 남은 그의 집무실에, 마틴의 목소리가 번개의 잔상처럼 남아있는 것 같았다.
“꾸…….”
한동안 지속된 고요에 마틴이 티엔의 나갔다고 생각한 모양인지 아기돼지가 티엔의 품에서 고개를 빠끔 내밀었다. 백호는 제 팔 위로 고개를 쏙 내미는 철없는 돼지를 보고는 앞발로 그의 이마를 툭, 쳤다. 아주 작은 움직임이었지만 호랑이의 앞발이 돼지의 머리만큼 컸기에 아동바동 버틴것이 무색하게 뒤로 발라당 넘어가버리고 말았다. 네가 잘못했다, 이하랑. 히잉…….
-
“누구세요? 아.”
차임벨이 울리는 소리에 현관문을 여니 티엔이 서있었다. 퇴근시간은 벌써 한참 전에 지나있었고, 시간은 벌써 자는 것 마저 부지런한 사람들은 슬슬 잠자리를 준비할 오후 9시 30분이었다. 그것을 모르는 티엔이 아닐텐데 굳이 이 시간에 찾아온 것은 재단의 일로 중요한 일이 있나보구나. 마틴은 그렇게 헤아렸다.
마틴은 얼굴에서 껄끄러운 기색을 도저히 지울 수가 없었다. 마틴으로서는 티엔의 얼굴을 보는 것이 불편했다. 평소 그와의 관계를 배제하고, 낮에 있었던 일 때문이었다. 「미안해, 형. 돼지가 되면 먹성도 돼지가 되나봐, 아니 변명 할 것도 없이 내가 잘못했어. 다음부턴 조심할게…….」 낮에 하랑의 진심어린 사과를 받고, 하랑의 사과를 받아들이고 나서야 자신이 누구에게 화풀이 했는지 깨달았다. 잘못한 것은 하랑인데, 고작 먹을 것 몇 알로 애먼 사람에게 불같은 화풀이를 했으니……. 자신이 이렇게 화가 났으니 알아달라, 관심 가져 달라, 당신이 달래어 달라, 떼쓰는 것도 아니고. 저도 모르게 뚜껑이 열려 충동적으로 저질러버린 일에 여러모로 민망하고, 부끄러워 내일 티엔의 어떻게 얼굴을 봐야하나 한참 골머리 싸매고 있었던 참에 들이닥친 티엔의 방문이었다. 준비되지 않은 마틴으로서는 당황스러울 법도 했다.
“이거 받게.”
티엔은 마틴에게 불쑥 종이상자를 내밀었다. 얼결에 상자를 받자 살짝 열린 틈으로 달착지근한 냄새가 훅 올라왔다. 티엔의 눈치를 괜히 한번 살핀 마틴이 조심조심 상자를 벌려 열어보았더니, 마틴이 좋아하는 CAFE ZIANee의 쇼트케익이 종류별로 한가득 들어있었다.
“네가 말한 것을 구할 수는 없더군.”
“어…….”
“하랑의 일은 내가 사과하지. 괜찮다면 그것이라도 받아주겠나.”
“저 여기 케이크 되게 좋아해요. 알고 계셨어요?”
자신도 모르게 네, 아니오를 말하기 전에 그 말이 나왔다. 절제하지 못한 충동에 후회한게 바로 1분 전이거늘, 말을 뱉고 나서야 후회가 들었다. 어떻게 알긴 어떻게 알아?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사왔겠지. 하지만 마틴은 케이크상자를 든 채로 바라는 대답이 있는 사람처럼 티엔을 빤히 쳐다보았다. 자신의 질문에 대한 정답을 본인도 가지고 있지 않았으면서, 갑작스런 방문에 놀란 가슴이 아직도 식지 못하고 콩닥콩닥 뛰었다.
“…….”
티엔은 예상하지 못한 질문을 들었다는 듯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그야 물론……. 아무렇지도 않게 아무데나 들러서 샀다, 라고 변명하면 될 것을 요령없는 티엔은 괜히 머쓱하게 가볍게 주먹을 말아 쥐곤 입 앞으로 가져가 ‘흠’ 마른 헛기침을 했다.
그 모습에 마틴이 바람새듯 피식, 웃었다. 어차피 무슨 대답을 바란 것도 아니었고, 그 답답한 망설임이 왠지 모르게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었다. 대답이야 아무려면 어떠나 싶은 마음이 이내 든 마틴은 검지에 케이크를 콕 찍었고, 이내 손을 뻗어 검지로 티엔의 코를 흑 훑었다. 달콤한 크림이 티엔의 코끝에 얌체처럼 묻었다. 사실 마틴에게 티엔을 용서하고 말고 할 것이 있었던가. 해야한다면 오히려 엉뚱한 곳에 화풀이를 한 이쪽의 몫이었고, 티엔의 이런 방문은 마틴에겐 배려였다. 캐이크 몇 조각에 순식간에 마음이 달래어졌다. 다음날 어색하게 만나지 않아도 된다는 안심에 긴장이 풀린 마틴은 굉장히 선심 쓴다는 듯이 말했다.
“이걸로 쌤쌤 해요. 혼자 먹기엔 많은데 같이 드시고 가세요.”
9.
앞으론 얌전히 굴게요……, 한 것이 바로 엊그제였는데. 이세상에 제일가는 말썽쟁이 하랑, 천방지축 얼렁뚱땅 앞뒤 하랑!
마틴은 본디 하랑의 댕기였던 새끼돼지의 빨간 머플러를 잡아 올렸다. 숨이 막히는지 아기돼지 하랑은 켁켁대며, 제발 풀어달라는 듯 허공에서 아동바동 몸부림쳤다. 하지만 마틴은 반성하지 않으면 봐주지 않겠다는 듯 단호한 눈으로 제 눈앞에 들어 올린 돼지를 보며 말했다.
“하랑! 자꾸 이러면 진짜 정육점에 팔아버릴 거예요!”
“꾸잉! 꾸이꾸이!! 꿀꿀헝헝오잉크오잉크!!”
복도를 지나다 그 유치한 실랑이를 본 티엔이 곁을 지나가며 말을 흘렸다.
“아직 너무 작아. 잡아먹을 만큼 크지도 못했다.”
“꾸이…….”
티엔이 제 편을 들어준다고 생각했는지 티엔을 향한 눈빛이 사소한 감동에 촉촉히 젖어있었다.
“싸고돌지 말아요. 매번 보호자가 이렇게 넘어가 주니까…….”
“아. 마틴, 당신 정도라면 딱 잡아먹기 좋게 살이 올랐군.”
“…….”
아주 순식간에 머리부터 발끝까지 새빨갛게 익어, 머리 뚜껑이 펑! 터지고, 귀에서 증기가 요란하게 뿜어져 나올 것 같았다. 돼지돼지, 돼지 소리 듣는 것이 하루이틀일도 아닌지라 이젠 익숙하기까지 한데, 갑자기 이렇게 전에 없이 당황한 마틴은 어버버,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아기 돼지를 다짜고짜 티엔에게 떠민 다음 서둘러 복도를 걸어갔다.
아고, 아파. 갑작스레 티엔의 단단한 가슴에 쿵 박은 아기돼지 하랑은 티엔의 품에 안긴 채 얼얼한 코를 앞발로 싹싹 문지르며 티엔을 올려다보았다. 티엔은 팔에 아기돼지를 안은 채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꾸이?(왜저래?)”
마틴은 두 손으로 화끈거리는 뺨을 감싸 쥔 채 복도를 달리듯 걸었다. 내가 미쳤지, 돼지라고 놀리는 게 뻔한데 대체 무슨 상상을 한 거야?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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