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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phers/short

[루드다무] 긍님리퀘

긍님리퀘  루드다무 / #왜 네 빛은 나만 비추지 않는 거야 왜 나만 사랑하지 않는 거야 / 납치 감금







이 전쟁이 끝나면, 


말을 더 잇지 못 한 그것은 그 얼마나 먹먹한 약속인가. 차마 맺지 못한 말이 무엇인지 다이무스로서는 알 수 없었다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귓가에 부서지듯 내려앉는 목소리를 따라오는 숨을 죌듯 껴안은 팔이나, 체온이나, 맞닿은 가슴 위로 느껴지는 심장 박동은 이 모든 것이 당신과 나의 생을 전제로 하는 것이라 말없이 이르고 있었다. 입을 달싹이려던 숨을 다시 삼켰다. 우리의 언어는 지금으로서는 모두 부질없을 뿐이니, 소리로 흩어지면 그것에서 끝나 버릴 것만 같아 다이무스는 그래서 ‘그래.’ 하는 짧은 말로 비관을 삼켰다. 


이제는 희뿌옇게 번진 그의 시야에 비친 모든 것들은 낯선 것들이 아니었다. 저 너머에서 치솟는 화마, 죽은 이의 혼처럼 시꺼멓게 흩어지는 시체 타는 연기, 검의 궤적을 따라 흩어지는 핏방울, 하늘에서 쏟아지는 잔해 섞여든 어떤 이의 팔, 목, 다리 따위, 그 점멸하는 생의 순간들 사이로 고막을 찢을 듯 깨지는 마지막 삶의 비명 같은 것들, 어떤 것도 낯선 것이 없었다. 다이무스는 일상처럼 늘어지는 아비규환 사이에서 겨우 안도를 느꼈다. 어차피 전장이 더욱 가까웠던 평화와는 거리가 먼 삶이었기에, 이 지리멸렬한 싸움이 언제 끝날지는 몰라도 살아남아 버틸 수 있겠거니. 믿음을 그런 처량한 방법으로밖에는 제 믿음을 지킬 수 없었다. 이 전쟁이 끝나면,


그 순간 눈앞에 새하얀 빛이 터졌다. 번졌다. 섬광이 다이무스의 시야를 메우자 모든 소리를 제거하듯 날카로운 이명이 그를 관통하였고, 온몸이 타들어가는 듯 뜨거워진 이후에는 감각이 마비되었다. 가장 눈부신 빛은 죽음을 닮아 있었다. 한 순간에 다이무스의 심장을 잡아챈 빛은, 그의 굳건하고 연약한 믿음을 한 순간에 무너뜨렸다. 틀렸군. 빛에 타들어간 의식이 어둠에 잠식되기 전 그가 마지막으로 다이무스는 자신의 삶에 있어 처음으로 죽음을 생각했다. 


!”


강제로 물에 처박히는 고문을 당한 사람처럼 숨을 뱉었다. 허억, 허억. 거친 숨소리와 가쁘게 오르내리는 가슴이 아직은 이렇게 죽을 수 없다 발버둥을 치고 있었다. 결핍된 호흡을 허겁지겁 삼키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둠에 채 익지 않은 눈은 눈앞의 현실을 인지하지 못했다. 가늠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가 지금 있는 곳은 전장이 아닌 곳에 있다는 것 정도였고, 절그럭, 쇠사슬 소리가 귀에 들린 순간에는 제 목에 쇠목줄 하나가 걸려 있다는 것 정도였다. 다이무스는 제 목을 더듬었다. 손끝에 닿는 서느런 감각에 불현듯 소름이 돋아 목을 비트니 바투 죈 목줄이 그의 숨통을 비틀었다. 냉정함을 찾지 못하고 목과 쇳줄 새로 손가락 몇 개를 욱여넣고는 잡아 뜯어내려 의미도 없이 바둥대니 “하하.” 처음부터 다 보고 있었다는 듯 기분 나쁜 웃음소리가 들렸다. 다이무스는 그제서야 이 공간 안에 다른 누군가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따박, …따박. 축축하게 젖은 발걸음 소리가 채 몇 번이 되지 않는 것을 보니 지척에 있었던 모양이었다. 길고 매끄러운 손이 다이무스의 손목을 붙잡아 당겼다.


“쉬이. 숨을 좀 더 천천히 쉬세요. 자, 하나, 둘…….”

“루드비히.”


오랫동안 목소리를 쓰지 않았기 때문인지, 목을 졸라맨 목줄 때문인지 적의가 들어찬 목소리가 깊이 잠겨있었다. 작은 말소리의 울림에도 짓눌린 울대가 아팠다. 루드비히 와일드는 자신의 이름을 짓씹듯 읊조리는 그 목소리가 마음에 들었는지 흡족하게 웃으며 흩어진 다이무스의 머리카락을 빗어 내리듯 다정히 어루만졌다. 손길을 피하기 위해 다이무스는 학습 능력이 없는 사람처럼 다시 고개를 비틀었고, 컥, 겨우 찾은 숨을 잃었다. ‘오, 이런. 조심하셔야죠.’ 걱정의 대사 치고는 흡족함이 찐득하게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머리를 쓸어넘기던 마른 손가락이 뺨을 타고 내려와 아귀를 바투 잡았다. 고요히 시선을 돌리는 명령은 애틋하기까지 할 만큼 다정스러웠으나, 이런 상황에서 베푸는 친절은 모욕이라는 이름에 가까웠다. 다이무스는 겨우 입술을 달싹여 소리를 흘리듯 말했다.


“여긴 어딘가.”

“드디어 당신과 제가 사랑할 수 있는 곳.”


다이무스는 인내를 삼키고서 다시 물었다.


“전쟁은 어떻게…….”

“이런.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당장 눈 앞에 당신을 구하려다 이 꼴이 된 나를 봐요.”


그의 말대로 그의 꼴은 성하지 않았다. 검붉은 피로 물든 붕대를 칭칭 감고 있는 한 팔은 이따금씩 움찔거리긴 하였으나 쓰기 힘든 모양인지 축 늘어져 덜렁거리고 있었다. 걸어오던 발걸음 소리를 생각해보면 절뚝대기라도 하는 듯 발걸음 소리가 엇박을 타고 있었으니 아마 다리도 성치 않은 모양이었다. 그는 오른쪽 머리와 눈을 다친 모양인지 머리에 붕대를 칭칭 감고 있었는데, 그 사이로 더 이상 빛나지 않은 그의 금발이 아무렇게나 삐죽대고 있었다. 좋은 몰골은 아니었다, 필히 자신도 그럴 것이리라. 하지만 루드빅은 아무렇게나 튀어나와버릴 것 같은 흥분을 억지로 누르고 있는 사람의 표정을 짓고 있었다. 다이무스는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쩔 셈인가.”

“말했을 텐데요. 깨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머리에 잘 들어오는 것 같지 않으니, 직관적인 말로 바꿔서 말해주죠.”

“…….”

“당신을 욕보일 겁니다.”


하나뿐인 눈동자가 욕망으로 번들거렸고, 다이무스는 그 너저분한 말과 나직한 목소리가 농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저 자는 자신을 어떤 식으로든 내버려 두지는 않을 것이었다. 숨만을 붙여 놓은 상태에서 살을 저미든, 뼈마디 하나하나를 부러뜨리든, 관절 하나하나를 토박 내든, 혹은 성적인 수치심을 뒤집어씌우든, 그는 먹잇감을 아주 집요하게 가지고 놀다 피 한 방울까지 핥아 내릴 것이다. 눈을 데록 굴려 손에 쥘 수 있을 만한 것을 찾아보았다. 다시 한 번 목을 슬쩍 비틀어 보았지만, 달아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다시금 깨달을 뿐이었다. 성치 않다고는 하나 팔다리의 움직임은 자유로우니 어떤 식으로든 달려드는 그에게 어느 정도 저항은 할 수 있을 것이나, 문제는 역시 목줄이었다. 새액, 새액. 막다른 길에 갇힌 피식자의 숨소리가 거칠었다. 기도가 꽉 죄는 탓에 천천히 호흡하는데도 여전히 벅찬 숨에 현기증이 일 지경이었다. 발끝에서부터 기어올라오는 어지럼증에 미간을 바싹 찌푸리자,


그는 제 눈앞에 섬광이 터진 순간과 자신을 집어삼킨 지독한 빛, 그리고 그 속에 잠식되어가며 떠올렸던 것을 다시금 상기해냈다. 그는 자신의 삶에 있어 두 번째로 죽음을 생각했다. 


“아!”


탄식은 루드빅의 것이었다. 불쑥 들어온 손가락이 불쾌하여 다이무스는 턱과 어금니에 더욱 힘을 주었다. 으드득. 쓸 수는 있었던 모양이군. 본디 붕대에 척척히 젖어있었던 피인지, 아니면 결국 살까지 뚫어버려 그 틈새로 흐르는 것인지 입안이 가득 비릿한 것이 혀 밑으로 핏물이 고인 듯 하였다. 혀를 깨물기 직전 다이무스의 입으로 급히 제 검지와 중지를 밀어 넣은 루드빅은 나머지 손가락으로 다이무스의 두 뺨을 뭉개듯 잡았다.


“이런 식은 곤란합니다.”

“큭…….”

“당신은, 반드시 살아야 하지 않습니까.”


그가 조소했다, 마치 다 알고 있다는 듯이, 


우리 이 전쟁이 끝나면……, 


“그 녀석은……!


그의 행방을 묻기위해 다이무스는 다급히 입술을 달싹였으나 루드빅은 다이무스의 머리를 사정없이 뒤로 내려찍었다. 쿵! 시멘트 바닥에 그대로 뒷통수를 처박았고, 입을 틀어막힌 그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그리고는 더 이상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끼이이이……. 쇳소리를 긁는듯 한 이명소리가 머릿속에 가득 들어찼다. 그대로 의식을 잃어버릴 것 같은 머리가 깨질듯 한 둔통에, 그 뒤를 따라오는 아득한 현기증에 다시 점점 아득해졌고, 그의 입을 틀어막고 있던 손가락이 쑥 빠져도 다이무스는 다시 입을 다물지 못했다. 중추신경의 통제를 벗어난 몸이 강제로 옷을 벗겨 내리는 루드빅의 손에 멋대로 흔들려도 저항하지 못 했고, 루드빅이 핏물이 고인듯 비릿한 자신의 입술에 입술을 부비고 혀를 내밀어 집어 삼키듯 얽어도 고개 한 번 비틀지 못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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