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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phers/text

[이글다이]


“미스터 홀든.” 부르는 목소리에 응답하고자 고개를 든 것은 마지막 결재 서류의 확인까지 마친 이후였다. 케이트는 한 박자 늦은 반응을 당연히 예상이라도 한 것처럼 애쉬 블론드 컬러의 귀 밑에 떨어지는 보브컷의 단발머리를 귀 뒤로 넘기며 살풋 웃었다. 사실 예쁜 여자가 어울리지 않는 직종이 어디있겠냐만은, 대출관련 업무를 담당하는 케이트는 은행 직원에 어울리는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꾸미지 않아도 예쁜 단정하고 담백한 얼굴은 신뢰감을 주기에 충분했고, 볕에 잘 말린 이불가지 냄새가 날 것 같은 포근한 분위기는 상냥하고 친절함을 담뿍 느낄 수 있게 해주었다. 대출 관련하여 은행에 찾아오는 고객의 열명 중 예닐곱은 케이트를 찾았고, 그녀는 런던에서 아무런 연고도 없는 포트레너드로 온 지 단 2개월밖에 되지 않았다. 그리고 지난 2개월 사이 지점의 정체되어있던 대출 실적 그래프가 상승곡선을 그리기 시작했다. 물론 그녀의 뛰어난 능력을 부정하거나 깎아내리는 것은 아니지만, 외모라는 것이 일종의 시너지효과를 내고 있다는 것을 무시할 수도 없을 터였다. 당장 회사(헬리오스)에서만 해도 지나가다 묻는 이들이 있었다. 거기 새로 온 은행원 아가씨가 그렇게 예쁘다며?


“무슨 일이지.” 다이무스는 귀에 걸친 안경을 벗어 책상위에 올려두며 물었다. “대출 창구에서 미스터 홀든을 찾는 사람이 있어요.” 선천적으로 타고난 듯 상냥하게 미소 짓고 있지만 어딘가 생채기가 난 자존심을 굳이 숨기지는 않는 목소리였다. 대출업무가 지명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나, 어떻게 책상하나 사이에 두고 자신을 마주앉아 있으면서도 다른 사람을 찾을 수 있나 하는 얄팍한 억울함이 담겨있는, 그런. 그것까지야 알아줄 바 없었다. 직급이 달라지고 자리를 이동하면서 창구에 직접 앉은지는 오래였지만 할 수 없는 것은 아니었다. 다이무스는 자리에서 조용히 일어나며 케이트에게 다시 물었다. “어디라고 하던가.” “그런 말씀은 없으셨고, 그저 다이무스씨를 찾는다고.” 옷매무새를 가다듬던 다이무스가 의뭉스레 슬쩍 미간을 찌푸리자 케이트는 생각을 되뇌듯 고개를 옆으로 기울이곤 왼쪽 위로 눈을 올려 떴다. 검지를 아랫입술에 가져다댄 그녀는 오물조물 말했다. “미스터 홀든과 머리색이 같았어요. 그리고…….” 다이무스는 선 채로 원래 그녀가 앉아있어야 할 쪽을 쳐다보았다. 이쪽 각도에선 파티션에 가려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머리가 길었고,” 억지로 경계를 숨기지 않는 다소 가식적인 그녀의 웃음이 조금 불편해진 것은 그녀가 검지를 자신의 오른쪽 눈앞에 비스듬히 세워 가져다대었을 때였다. “오른쪽 눈에 이렇게 긴 흉터도 있었던 것 같네요.”




“왔어? 이쪽 의자가 더 편해 보이더라고. 그래도 있는 집 자식인데 좋은 데 앉아야지.”


상당히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었으나 반갑지는 않았다. 이글 홀든은 의자에 허리를 반쯤 뉘이듯 비스듬히 앉아 다리를 꼬고 있었다. 홀든이라는 성씨에 맞지 않는 상당히 무례한, 약간의 천박함마저 느껴지는 태도였다. “대출 손님이 좀 더 고급인가봐?” 하긴 교양을 갖추고 있다고 한들 언제는 그 이름에 맞는 격식이나 품위를 차린 적이 있던가. 매번 무어라 일러도 잔소리 취급만 할 뿐 맞지 않는 옷보다 더 거추장스럽다며 한 귀로 흘려버리기만 할 뿐인 그를 다그치는 것도 이제는 이골이 났다. 애초에 자신의 말을 들을 생각이 없는 사람과 대화한다는 것은 종래엔 탈력감을 주기 마련이었다. 그와의 의사소통 행위가 가져다주는 만성적인 피로감은 이제는 조건반사에 가까웠다. 다이무스는 자리에 도착하자마자 지체 없이 의자를 뒤로 뺐다. 상담을 위해 찾아온 것이 아님을 뻔히 알았기에 다이무스는 단지 의무적으로 말했다. 삐걱대며 앓는 의자소리에 섞인 한숨을 쉬는 듯한 목소리가 벌써부터 피로함에 버석하게 말라있었다. 생각해보면 처음부터 이렇게 꼬여있었던 건 아닌 것 같았다. 언제부터 이렇게 당연하다는 듯이 변했을까. 이미 너무 먼 길을 돌아왔기에 그런 의문은 부질없었다.


“정말로 대출이라면 직업도 신용도 없는 네게 빌려줄 돈은 없다.”

“예쁘다고 하더니 생각보다 별로다? 형 취향도 아니고 말이야.”

“사적인 이야기라면,”

“차라리 마를렌이 귀엽지 않아? 아차차. 그 꼬맹이는 은발이 아니지, 참.”

“업무 방해 말고 돌아가라.”

“그렇지, 크리……쯧, 자네트는 어때? 아~아! 거기는 홀든이 아니구나.”

“여기까진가보군.”

“아직 용건 안 끝났어. 직장에서 개망신 당하고 싶지 않으면 앉아.”


다이무스가 데스크 위로 손을 짚으며 아주 찰나 앉은 자리에서 일어나자, 경박하게 떠들던 목소리가 사납게 어깨를 짓눌렀다. 날이 선 음성은 허튼 소리에 경고라는 이름을 달았다. 다이무스가 슬그머니 고개를 들어 그를 보았더니 저급한 장난기를 띠고 있던 눈빛이 언제 그랬냐는 듯 며칠을 굶주려 성난 맹수의 것으로 바뀌어있었다. 둘의 대화는 항상 이런 식이었다. 서로의 입장이 어떻게 변하든 외면하고, 강제한다. 귀를 틀어막은 자의 목덜미를 움켜쥐고 세운 이를 억지로 숨통에 찔러 박는 것이 둘의 소통이었다. 의사전달의 여부는 중요하지 않았다. 외면했고 발화發話했다는 사실만 있으면 족했다. 둘은 늘 이렇게 답답하고 언제 터질지 모르는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서로를 마주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방식으로 밖에는 형제라는 그 둘의 관계를 유지시킬 수 없었다. 아마 이글 홀든을 받아들이는 순간 천륜이 악살 나고, 다이무스 홀든을 이해해버리는 순간 이글 홀든의 세계가 무너져 내릴 것을 어쩌면 둘은 알고 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뭐. 나야 상관없다만.” 어쩌면 더욱 다급하게 쫓기고 있는 것은 이글의 쪽임에도, 그는 언제 그런 표정을 지었냐는 듯 한껏 여유로운 척 입술을 삐죽여 웃으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서로 지쳐 쓰러지기 직전일지언정 공존할 수 있는 방법이 우습게도 이딴 것뿐이었다. “어린 애도 아니고, 투정이 날로 지나치군.” 다이무스는 지친 한숨을 삼키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몰랐어? 남자는 평생 애야.” 


난 형에게 평생 떼를 쓸거고. 이글은 품을 뒤적여 무엇인가를 꺼내더니 데스크 위로 올려 다이무스에게 내밀었다. 종이는 네모반듯하게 접혀있었는데, 그 네모반듯하다는 말이 어색했다. 얼마나 많이 구겼다 폈다 하였는지 종이는 자잘하게 울룩불룩했고, 너덜너덜했다. 심지어 종이는 앞뒷면이 반대로 접혀있었다. 바깥쪽을 향한 면에는 글씨가 써져 있었는데, 덕분에 다이무스는 그 종이가 일전에 이글에게 보낸 편지라는 것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수번이고 구겨지고 구겨졌던 탓에 글씨마저 군데군데 닳아있었다. 「……를 만나야겠다. 그와 연락이 닿질 않는다. 너 같이 단순한 녀셕에게는 아무 의미 없었을 결과가 자존심 강한 그에게는 엄청난 충격이었다.」 특히 벨져의 이름은 꼭 부러 긁어내리기라도 한 것만큼 희끗하게 닳아 알아보기 힘들었다. 기억으로 가늠할 밖에. 다이무스는 그 편지에 돌아온 답장의 내용을 기억하고 있었다. 「형의 생각에 날 끼워 맞추려고 하지 마, 서로 힘들어질 뿐이라고.」그의 발걸음만치나 가볍게 흘려 쓰는 평소의 필체가 아니라, 꼭 저주라도 퍼붓듯 종이 군데군데가 뚫릴 정도로 눌러쓴 글씨 또한 기억하고 있었다. 「형이 내게 한 부탁에 대한 대답 또한 이미 알고 있지? 설령 내가 작은 형의 행방을 안다 해도 형에겐 알려줄 리 없다는 것을.」


“네 대답은 잘 알고 있다.”

“성질이 언제부터 그렇게 급했어? 펴 봐. 구겨서 던지지 않은 데엔 다 이유가 있어. 마지막으로 베푸는 최소한의 예의같은 거거든.”


불편함과 불길함은 달랐다. 감이라는 것을 믿지는 않아도 간과할 수 없을 때가 있었는데 지금이 그때였다. 답지 않게 갑자기 심장이 불안하게 뛰는 것으로 보아 과거 편지였던 저 종이를 펼쳐서는 안 될 것 같았다. 접혀진 종이 안쪽에 있는 내용물 혹은 적혀있는 무언가가 문제가 아니라 이글의 생각이 문제였다. 다이무스는 언제나 그러하듯 다시 외면하는 쪽을 선택했다. 종이를 펼치는 대신에 그 뒤로 두 손을 깍지 껴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그것은 일종의 경계였고 거부의 완곡한 표시였다. 다만 누군가의 방어기제는 기어코 누군가의 속을 뒤집어 놓을 때가 있었다. 삐딱하게 기대앉은 이글은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 쓰게 웃으며 고개를 작게 두어번 끄덕거렸다. 그렇지, 형은 나에게 항상 그런 식이지. 내가 늘 이딴 식인 것처럼. 언어, 시선, 표정, 말투, 자기를 향한 그 모든 것들이 보이지 않는 손이 되어 발작하는 심장을 쥐어 터뜨리기라도 할 듯 움켜쥐어 숨이 턱 막히는 것 같았다. 이런 저릿함은 불유쾌하다. 그래서 홀든 이라는 이름을 가진 다이무스의 숨통에 찔러 박은 이에 날을 세웠다. 그가 자신에게 한 딱 그만큼 잡아 흔들어놓을 차례였다, 마치 생존본능처럼. 이글은 저가 내민 종이를 집어 들었다. 언제나 그랬었던 것처럼 보지 않겠다고 하면 보게 만들면 될 일이었다. 홀든의 가주가 될 몸께서 감히 관심을 끊을 수 없는 주제임을 아니까. 이글은 종이를 펼쳐 내려놓은 다음 소중한 것이라도 되는 듯 손으로 몇 번 쓸어 판판하게 폈다. 휙, 180도 회전한 종이가 다이무스에게 정방향으로 들이밀어졌다. 제법 자세하게 표시된 약도였다. 


“작은형은 거기 있어. 그리고 나는,”

“이글.”

“벨져를 죽일 거야.”


오늘 밤에. 이글은 그렇게 말을 덧붙이며 뱀처럼 웃었다. 그렇구나, 하고 받아들이기엔 벨져의 이름과 행방도 너무 갑작스러웠고 덧붙은 말이 터무니없었다. 이글 홀든이 할 수 있는 가장 질 나쁜 농담이라고 생각했다. 기가 차서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긴 세월 이어져온 의미 없는 이 힘싸움도 이젠 지칠 법도 했는데, 이글은 다이무스를 극으로 밀어 넣는 것이 인생의 목표인 사람처럼 온갖 저열하고 치졸하고 심지어 가끔은 어린아이도 하지 않을 유치한 방법으로 죽어라 달려들었다. 지치다 못해 이젠 지겹기까지 했다. 갑자기 치밀어 오르는 짜증을 겨우 추스르며 숨을 짓눌러 삼켰다. 애석하게도 다이무스는 ‘왜’라고 이유를 묻는 방법을 몰랐고 그저 다그치는 방법밖에 알지 못했다. “이글.” 그리고 듣는 법을 모르는 이글은 말허리를 잘라먹었다.


“질 나쁜 농담이라고 생각하지? 아니. 정말로 죽일 거야. 설마 고작 햇병아리 결정검에 나가떨어진 놈한테 내가 질 것 같진 않거든.”


기가 막힌 일이었다. 장난질하기 좋아하는 놈이 왜 굳이 사적인 자리도, 그렇다고 하여 회사도 아닌 은행의 대출창구로 왔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은 표정이었다. 직장도 집도 신용도 없이, 그 자신 말고는 그의 주위에 아무것도 없다 하여도 대출 심사쯤이야 무난하게 통과할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얼굴을 하고있다니. 다이무스는 허, 하고 낮은 탄식을 짧게 내뱉었다. 이례 없이 진지한 표정에, 그가 뱉은 말들은 불순물 없는 진심뿐이었으나 웃기지도 않는 촌극이 따로 없었다. 속이 뒤틀릴만치 유치한 희롱과 잔인한 신뢰감이었다


“그놈이 괜히 아버지의 기대를 받은 것도, 홀든 검사들의 우두머리가 된 것도 아니지. 아마 내가 질지도 몰라.”

“…….”

“그리고 벨져 성격에 놈을 죽이려고 달려든 나를 살려둘 리도 없고 말이야.”


순간 배신당했다는 기분이 들어 다이무스는 깍지를 낀 손에 바짝 힘을 주었다. 턱관절에 힘이 바짝 들어가 어금니가 꽉 다물렸다. 지난한 시간 동안 서로 등을 돌린 채 외면하고, 강제하고, 그렇게 숨구멍을 틀어막고 감정 위로 상처를 덧칠하듯 새기는 시간을 인내할 수 있었던 이유는 둘 사이에 지켜야 할 공통적인 것이 존재했기 때문이고, 거기에 이글에게서도 암묵적인 동의가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서로를 속박하는 것이 폐에 물이 차는 것처럼 숨이 막히고 고단하여도 서로 다른 방식의 엄살을 부릴지언정 감내해야 할 수 있다고. 홀든이라는 이름으로 서로를 묶을 수 있었던 그리고 그것을 유일하게 가능하게 만들었던, 서로가 끝없이 갈구하고 도망치며 빚어낸 썩어가는 오해라는 순환을 최악의 방법으로 이탈하려 하고 있었다. 


“언제부터 알고 있었나.”

“형이 그 빌어먹을 편지를 내게 보내기 전부터.”

“이제 와서 이러는 이유를 모르겠군.”

“그러니까 ‘왜’냐고 하는 거지? 하. 그걸 이제야 묻다니.”


그는 다이무스를 조롱하듯 허탈하게 웃었다. 바싹 마른 만큼이나 버석한 웃음이었다. 책망하듯 바짝 날이 선 목소리는 원망이 뚝뚝 흐를 정도로 척척하게 젖어있었다. 이글이 그 언젠가 본가를 떠나는 등 뒤로 던지던 목소리와 같았다. ‘이 빌어먹을 집안에 목을 매는 이유를 모르겠다.’ 그 말이 미련을 털기 위한 스스로에게 하는 말 같기도 했고, 장남이라는 이름을 고지식하게 짊어진 다이무스에게 하는 말 같기도 하였으나 그때도 다이무스는 ‘왜’하고 묻지 않았다. 그저 ‘대체 언제 정신을 차릴 거냐.’고 또 그렇게 다그치기만 했을 뿐이었고, 그 목소리에 이글은 잠시 멈춰서더니 아무런 대답 없이 이내 발걸음을 도망치듯 집을 나섰었다.


“한계야. 이정도면 나 주제에 지독하게 잘 버텼다고 칭찬해줄만 하지 않아?”

“…….” 

“나도 지쳐. ……그래. 형이 습관처럼 말하는 그거야.”

“…….”

“결착을 지을 때지.” 


고장나버린 사고의 책임을 묻는 것 같은 눈빛을 똑바로 마주할 자신이 없어 다이무스는 깍지 낀 손을 풀었다. 이글이 내민 약도, 그러니까 그 언젠가 제가 이글에게 보냈던 이젠 다 구겨진 편지를 자신의 앞으로 끌어당기고는 차근차근 포개어 접었다. 「형의 생각에 날 끼워 맞추려고 하지 마,」답장의 내용이 머릿속에서 끊이질 않고 어지럽게 메아리쳤다. 두통이 밀려왔다. 내가 널 억지로 끼워맞췄다고. 그렇다면,「서로 힘들어질 뿐이라고.」무엇이 최선이었단 말이냐. 서로 지치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을 찾는다는 것은 과욕이었다. 정작 하고 싶은 말은 다시 씹어 삼키며, 다이무스는 이글이 내밀었던 것 보다 한 번 더 접은 편지를 돌려주었다. 그는 언제나 자신이 최선이라고 선택하는 것만을 행하고 말했다. 지금도 그러리라 의심치 않았다.


“쓸데없는 생각 버려라.”


그리고 이글은 부정했다. 곱게 내밀었던 것이 정말로 마지막으로 행하는 예의였던 모양인지, 편지를 무참히 구겨쥐곤 다이무스의 가슴팍에 던졌다. 툭, 단정한 약복에 부딪힌 종이뭉치는, 툭, 깔끔하게 잘 닦인 바닥으로 떨어졌다. 아무리 깔끔하다 하여도, 바닥은 바닥이었다. 발치에 떨어진 그것에 순식간에 먼지가 엉겨 붙었다. 쫓기고 쫓기다 벼랑끝까지 내몰려 더이상 살아날 구석이 보이지 않는다면, 죽을길이 빤하다면 추락은 더 이상 무서울 것도 없었다. 함께 나락으로 떨어지는 기분은 차라리 비행과도 같을 것이었다. 


“반드시 둘 중 하나는 죽어.”

“이글.”

“우린 둘 다 은발이고, 홀든이지. 어느 쪽을 선택할래?”


이글은 이제 볼 일은 다 끝났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이무스는 석고상처럼 굳은 것 같았던 고개를 천천히 들어 올려 시선을 마주했다. 빛을 등지고 있어 얼굴에 어두운 그림자가 져있었다. 수년을 외면했던 고단한 얼굴이 이런 상황이 되고 나서야 온전히 눈에 들어왔다. 좋던 피부가 조금 거칠어진 것 같기도 하고, 살이 내려 뺨이 안쓰럽게 패여 있었고, 눈밑에 내린 어둑한 그림자가 자신과 똑 닮은 모양새로 자리 잡고 있었다. 그 어린 날, 어둠이 내린 밤하늘 아래에서도 시원하고 청명하게 빛나던 푸른 눈동자를 기억했다. 그 눈빛이 언제 저렇게 시꺼멓게 죽어버렸는지 가늠할 수 없었다. 조금 더 일찍 알았다고 한들 다른 방법을 알지 못하는 우리에게 달라질 것이 있었을까. 눈가리고 아웅하듯 미루고 미뤄왔을 뿐, 어쩌면 그간 외면했던 것은 이글 홀든이 아니라 선택을 강요받는 이 순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젠 제 살처럼 엉겨붙은 집착을 뜯어내지 못하는 이상 당연하게 예견되어있었던 일이었을 것이라는, 그런. 방치당한 집착과 오해가 곪을 대로 곪아있었다. 


“아차. 너무 당연한 걸 물었나.”

“그만 둬라.”

“형은 벨져를 사랑하잖아.”


목소리는 잘 벼려진 검이 되어 심장을 찔렀다. 시간은 붙잡아달라는 애원을 이런 방식으로밖엔 표현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다이무스는 그 말에도 어떤 긍정도 부정도 하지 못했고, 이글은 이번에도 또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곧 죽을 사람처럼 비릿하게 웃더니 더 이상 미련 없이 뒤돌아서 은행을 빠져나갔다. 그가 떠난 뒤에도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우두커니 앉아있던 다이무스는, 너는 아무것도 모른다, 그 말을 할 수 없었던 마른 입매만 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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