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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phers/text

[이글다이] 편지


형, 나는 사랑에 빠졌던 그 여름밤을 기억해. 이건 아직 내 머리가 날개뼈를 겨우 가릴 때쯤의 이야기야. 


이 은발이 아니고서야 우리가 어떻게 한 배에서 나온 자식이라고 믿을 수 있을까? 지금도 그렇지만 형과 나는 너무 많은 것이 달랐어. 홀든의 차기 가주라는 자리가 당연시 될 만큼 너무 잘 어울리는 형과는 다르게, 뒤에서 홀든이란 성씨가 아깝다는 소리를 듣기도 하던 나였지. 형과는 다르게 홀든에 걸맞는 신의, 인내 같은 것들은 나에게 맞지 않았어. 그렇지만 난 홀든이라는 이름을 상당히 좋아해, 꽤 멋드러진 옷이니까. 그 이름에 붙은 부와 명예, 지위, 권력. 그만큼 더럽게 귀찮은 것들도 많이 달라붙어 있었지만, 뭐 내가 좋아하는 것들도 그 이름 안에 똘똘 뭉쳐있잖아. 제일 마음에 든건 그거야. 홀든의 검술, 커다란 칼 한 자루의 힘. 허세라고 해도 좋아. 다른 것은 몰라도 검술에서 만큼은 기대를 받았고, 형처럼 그 지겨운 수련을 형만큼 부지런하게 하지 않아도 형과 어깨를 나란히 할 만큼의 실력은 지금까지도 내 자신감의 원천이니까. 


얘기가 조금 엇나갔네. 천재와 범재의 이야기를 하자는 건 아냐. 그러니까……. 난 사실 그날 처음으로 다이무스라는 커다란 벽을 느꼈던 것도 같아. 그저 칼을 휘두를 줄만 알았던 내가 칼을 든 채로 병신같은 무력감에 얼어있을 때 형이 도와줬잖아. 형도 기억해 주었으면 좋겠다. 그날은 다가오지도 않은 성인식을 치른 것마냥 홀든의 막내가 처음으로 사람을 죽인 아주 의미있는 날이거든. 


알지? 매일같은 수련은 아주 토가 나오게 신물 나고 지겨웠잖아, 사실 하지 않아도 지쳤다고. 얼마 하지도 않은 수련에 지쳐 한 여름 뙤약볕에 칼을 지지대 삼아 무릎을 접어 앉아서 불평불만을 쏟아내고 있으면 형은 내 이마에 칼끝을 겨누고선 말했지. “꼴사나운 모습 보이지 말고 일어나라.” 매번 그런 말을 할 때 마다 형 표정, 얼마나 험악했는지 알아? 너무 진지해서 그거 정말. 그때도 나이에 딱 맞는 얼굴은 아니었지만, 몇 살은 훨씬 더 들어보여서, 아, 거 되게 우스웠다고. 참느라 힘이 들 정도는데 말이야. 아무튼 칼을 잡고 형이랑 마주서면 모든게 다 유난했어. 칼날이 부딪히는 날카로운 소리, 부딪힐 때 마다 손끝을 저릿하게 만드는 울림, 그 잘난 다이무스 홀든을 몰아세운다는 만족감. 그런것들 덕에, 형이 그렇게 날 억지로 일으켜 세워 대련을 하는 것이 그나마 유일한 숨구멍이었지. 그래도 지겨워. 써먹지도 못할 검술을 이렇게 연마만 해서 무엇 하나, 전장으로 나가고 싶어 안달이 나있었던 나야. 뭐 겉으로 보자면 지금이랑 크게 다를 거 없지만 그땐 독수리의 이름을 하고서도 우물 안 개구리 같은 꼴이었지.


이해해줄 거라 믿어. 난 형처럼 진중하지도, 한 가지에 진득하게 집중할 수 있는 성격이 못되니까. 아! 물론 내 마음이 가볍단 건 아니야. 문맥을 파악해줘, 무슨 말인지 알지? 어쨌든. 아무리 살벌하게 한대도 그 지겨운 수련이 실전이 될 수는 없으니까 날끼리 부딪히는 소란스러운 소리도 지겨웠어. 이 검을 언제쯤 쓸모 있게 만들 수 있을까, 갑주 위로 칼을 그어 살을 찢고, 근육을 갈라 피를 쏟아내게 만들어 껄덕거릴 틈도 없이 숨통을 끊어놓자! 힘과 실력의 차이가 생사를 결정하는, 베지 않으면 내가 죽어버리는 전장이라는 놀이터는 얼마나 흥미로울까, 참을 수 없는 호기심과 특출난 내 강함을 확인하고 싶은 욕망에 앓았지. 자극적인 놀이에 안달이 나있었어. 베어버린 사람의 수가 내 과신의 근거가 될 거라는 생각에 제발 무슨 일이든 터지기를, 성탄절을 손꼽아 기다리던 아이처럼 밤을 지새우던 나날 중에, 


흠. 몸은 생각보다 듯대로 움직이지 않더라고. 나에 비하면 정말 별 것도 아닌 놈이었고, 결국 내 일격에 쓰러지긴 했었는데. 내 칼은 처음으로 근육을 가르고 피에 쓸리던 감각을 기억할까? 나는 아주 또렷이 기억해. 숨이 곧 끊어질 모양새로 벌레마냥 발작하듯 덜덜 떨던 그 새끼도 기억하고, 코앞에 다가온 살인이라는 단어에 지레 긴장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아주 병신 같았던 나를 기억해. 새까만 어둠에 먹혀버린다는 게 그런 느낌일까. 나는 분명 그 놈을 찌르고 싶어서 안달이 났는데 꼭 까만 연기손 같은 것들이 가시덤불마냥 내 몸을 아주 꽁꽁 엉켜들어서 도저히 움직일 수가 없더라고. 심지어 한여름인데도 얼마나 추운지, 오한에 덜덜 떨다가 칼까지 놓칠 뻔 했다니까! 그대로 두면 출혈로 알아서 뒤질 반송장 앞에서 말이야. 비웃지는 말라고, 천성이 착하게 태어난 우리 귀여운 홀든의 막내는 아직 그때까지만 해도 세속의 때를 몰랐었으니까.


그런데 언제 도착했는지 형이 내 뒤에 섰어. 칼을 쥔 내 손 위로 손을 겹쳐 잡았지. 내가 정말 그 순간을 어떻게 잊겠어? 형이 칼을 붙든 내 손을 치켜 올리고 그놈 심장에 사정없이 내리 꽂았잖아. 여기까지 읽으니까 슬슬 기억나는 것 같지? 아마 늑골에 걸렸었는지, 그것까지 부수고 들어가기야 했다만 덕분에 꽤 뻑뻑했어, 그치? 뼈가 부서지는 소리는 생각보다 별 거 없더라? 당연한 얘기로 놈은 그대로 죽었어. 그런데 형은 내 손이 아직 떨리고 있는 게 못마땅했던 것 같아. 마른 침만 삼키는 동안에 형이 내 위로 겹쳐 잡은 손을 물끄러미 보더니, 한 번 더 들어 올렸어. 푹! 놈의 심장을 다시 한 번 찔렀지. 누가? 다이무스 홀든이. 적군이라도 시체에는 예를 갖추라던 아주 답답할 정도로 예의바르고 고고한 다이무스 홀든께서, 내 교육을 위해서 시체를 세 번이나 들쑤셨단 말이야! 내가 얼마나 놀랐겠어! 그때 형이 그러면서 뭐라고 말했는지 기억해? 지금 생각하면 조금 낯간지럽기도 한데, 그때 난 흘려들을 수가 없었어. 형 덕분에, 심장을 관통해 시뻘건 피를 허겁지겁 마시던 내 칼 덕분에 내 몸의 떨림이 진정이 되기 시작했거든. “망설이지 마라.” 두번째에 찌를 땐 그렇게 말했고, “다음번엔 네가 죽는다.” 그 말과 함께 마지막으로 가슴을 쑤시고선 형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어. 내 떨림도 멈췄고 대신 놈의 죽은 심장 대신인 것처럼 내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지. 


그런 생각이 들긴 했어. 아, 이래서 다이무스 홀든이구나. 형은 나보다 이런 걸 훨씬 일찍, 많이 겪었겠구나. 난 아직 형을 따라가기엔 멀었구나. 그런데 사실 고백하자면 그런 얄팍한 존경심은 상당히 오랜 뒤에 그것도 콧방귀처럼 아주 짧게 흘렀다 간 생각이고, 그땐 고개를 천천히 돌려서 보니까 형의 얼굴이 장난 아니더라고. 그냥 그런 생각만 들었어. 맨날 하는 거하고 분명 평소랑 똑같이 침착하고 재미없고 딱딱한 얼굴을 하고 있는데, 눈빛이 유난히 형형하고 낯빛이 유난히 서느렇게 느껴졌어. 시커먼 밤에 달빛은 너무 환해서, 음영이 유난히 깊게 진 탓인가. 흠……. 어느 정도였냐면, 형의 얼굴에 튄 빨간 핏자국이 아주 새파랗게 보일 지경이었어. 피가 아닌 다른 알 수 없는 얼룩인 것처럼 말이야. 내가 잃어버린 현실감이 어떤 건지, 어느 정도였는지 감이 와? 솔직히 말하자면 난 내가 겪은 건데도 감이 잘 안 와. 그때 뛰었던 심장은 분명 내 심장인데 내 심장이 아닌 것처럼, 그 박동을 다시 생각해도 내가 그때 느꼈던 것만큼 떠올릴 수 있지 않을 것 같거든. 그만큼 세차게 뛰었어. 쾅쾅쾅쾅! 온 몸에 혈액이 도는 소리에 아주 골이 깨질 지경이었다고. 형의 손을 빌리긴 했지만 내가 저지른 (아무리 정당한들)살인을 했다는 것도, 내 눈앞에 이젠 한 때 사람이었던 시체도 전혀 무섭지 않았는데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속이 울렁거렸어. 하하, 결국 꼴사나운 모습을 보이긴 했지. 형의 손을 뿌리치고 검도 놈에게 꽂은 채로 등 돌려 주저앉아 위산밖에 게워낼 게 없는 토악질을 했으니까. 그때 형이 날 얼마나 한심스럽게 생각했는지 모르겠는데, 나도 홀든이야. 검사 집안의 셋째 아들 이글 홀든. 진짜 시체나 살인이나 그딴 게 무섭고 징그러워서 그랬던 게 아니란걸 꼭 알아주길 바래. 응? 그랬으면 내가 이러고 살겠어? 진짜야, 형이 내게 해준 건 그때 딱 한번 뿐이었는데, 뭐든 처음이 어렵지 두 번은부터는 쉽더라고. 그때 왜 그렇게 질렸는지 우습지도 않을 정도로. 나중엔 어떤 놈이 날 좀 재밌게 해줄까, 몸이 근질근질 한 게 기대까지 되더라니까. 싸움 터질만한 곳을 골라다니기도 했지. 아, 또 말이 빗나갔는데 그러니까 내 말의 포인트는 그때 형의 얼굴을 봤는데 그때부터 이유를 알지 못하는 울렁거림과 감당할 수 없었던 심장박동이 있다는 거, 그거야. 형은 그때까진 나에게 그냥 형이었어. 


아무튼 나 그래서 한동안 형을 피해 다녔잖아. 그것도 기억나지? 그 즈음에 작은형이 형한테 “이글이랑 무슨 일 있어?”라고 물었다고 들었어. 형 그때 “아무 일도 없었다.”라고 했다며. 음, 형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아무 일도 없긴 했지. 그래도 좀 섭섭했어. 아무튼 작은형이 나한테 와서 말해주더라고. 자기밖에 모르는 작은형 눈에도 보일 정도로 나 형을 대놓고 피해 다녔었나봐. 물론 형이 무섭다거나 그런 것도 아니었어. 그냥 형을 보면 그날만큼은 아니더라도 계속 가슴이 뛰었어. 손끝에 남은 뼈와 살을 묵직하게 꿰뚫는 감각보다 내 손 위로 겹쳐진 형의 손이, 형 얼굴에 짙게 그늘진 음영이, 나직한 목소리가, 서늘하게 깔아보던 눈빛이, 퍼렇게 보이기까지 했던 형 뺨에 튄 핏자국이 더 선명하게 생각났다고. 왜 그런지는 모르겠는데 그런 것들이 자꾸 심장을 사납게 만들었어. 심지어 얼굴까지 빨개졌다고! 음……. 그땐 그건 아마 형 앞에서 토악질 해대는 모습을 보였던 게 죽을 만큼 쪽팔려서 그랬던 것 같다고 생각했어. 아, 씨발(지우고 싶었던 것인지 이 위를 덧그린 흔적이 있으나 읽을 수 있었다) 꼴사납게 그게 뭐야 진짜.


그런데 더 웃긴 건 뭔 줄 알아? 형이 나를 볼까봐 그렇게 피해 다니면서도 난 또 형을 쫓아서 따라다녔다? 형만 보면 가슴이 뛰고 얼굴이 빨개지는 건 별개로, 형은 피해 다녀야겠는데 또 형이 내 눈 앞에 안 보이는 건 싫더라고. 부디 죄책감을 가지길 바라. 형이 홀든의 막내 귀염둥이를 관음증 환자로 만들었다, 이거야! 그러니까 변태라고 하지 마. 책임 소재는 형에게 있으니까. 아니, 뭐 사실 변태라고 해도 난 신경 안 써. 그러면 마음껏 훔쳐봐도 된단 소리잖아? 물론 이제 더 이상 형을 훔쳐본다거나 할 일은 없을 테지만, 몰래 보는 재미도 쏠쏠 했으니까 종종 그럴 거 같기도 해. 난 지키지 못할 말은 안 해, 솔직하게 말하자면 안한다는 말은 못하겠다. 부디 간지러운 내 시선을 느끼고 가끔 흠칫해주면 좋겠어. 아, 자꾸 말이 새네. 작문 시간에 좀 더 열심히 공부 할 걸 그랬어. 하지만 마이어 선생님의 수업은 정말이지…….


아직 안 끝났으니까 제발 접지 말라고. 당부하건대 다 읽고 나서도 절대 버리지 마. 부디 고이 접어 책 사이에 평생 간직해주길 바라. 기억이 빛바래기 전에 한 번씩 다시 꺼내서 읽어보고. 잊었을지 모르겠는데 처음에 말했듯이 막내의 사랑 고백 이야기니까. 그래, 이제 진짜 중요한건 여기 있어. 끝이 다 와 가. 형은 인내를 잘 하지? 이젠 종이도 모자라니 빨리 끝낼게. 


크리스티네 프란츠가 홀든의 저택에 온 적이 몇 번 있잖아. 날짜는 중요하지 않아, 그냥 그런 날 중 하나였다는 것만 알아둬. 굳이 덧붙여 주자면 정원에 장미가 가득 핀 날? 사실 그녀가 온 줄도 몰랐어. 그냥 몸이 찌뿌둥하니 어디 재미난 일 없나 검을 살피고 있었는데, 또 문득 우리 형 생각이 나더라고. 내 눈에 가둬야 직성이 풀릴거 같았어. 뭐, 짜증이 났다거나 하진 않았어. 언제부터인지 몰라도 형을 찾아 나서는 건 꽤 재밌는 놀이가 되어 있었거든. 발견하고 나면 의외의 모습을 많이 알게 되니까……. 난 형이 생각하는 것 보다 형에 대해서 아주 많이 그리고 자세히 알고 있다고. 아무튼 형은 벌써 밖에 나갔을지도 모르지만 저택부터 뒤져야지 무슨 수가 있겠어. 빌어먹을 집구석, 넓기는 좀 넓어? 막막해서 발코니로 뛰쳐나가 어디 보자 하는 심정으로 정원부터 살폈는데, 오, 거기 형이 거기 있더라고. 크리스티네랑 같이 있었지. 둘이서 무언가 대화를 나누는 것 같은데 잘 들리지가 않았어. 분명 웬일로 한껏 누그러진 표정을 한 형이 눈앞에 보이는데 잘 들리지가 않았다고! 호기심이 안생기고 버텨? 귀를 세워 봐도 들릴 기색은 없고, 직접 내려가 봐야하나, 그런데 그 사이에 끼어들 분위기는 아닌 것 같은데 이걸 어쩌나. 오래전에 고친 손톱 물어뜯는 버릇이 다시 동해서 물어뜯으면서 고민하고 있는데, 아, 재수 없는 벨져 홀든. 대체 언제 내 뒤로 바짝 붙은 건지 내 어깨를 툭 치면서 묻더라고. 하마터면 꼴사납게 소리 지를 뻔 했다니까! 형한테 들킬뻔 했다니까! 흠, 아무튼 작은형이 뭐라고 했냐면 “뭘 그렇게 보고있어?”라고 했어. 나는 “아무것도 아냐.”라고 했고. 그런데 내가 여전히 형과 크리스티네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으니까 작은형이 엄청 재수 없는 소리로 웃더라고. 알지? 작은형 웃는 소리 진짜 재수 없는 거! 기분 나빠지는 거! 암튼 그러고서 작은형이 한 말이 이거였어. “너, 사랑에 빠진거로구나.”


둔기로 후두부를 후드려 맞은 기분, 알아? 그 말을 듣는 순간 딱 그 느낌. 작은형은 다시 제 갈 길 갔는데 정신이 하도 멍해서 그 소리가 다 안 들릴 지경이었어. 사랑이라니. 내가 크리스티네에게? 와, 진자 어이가 없으니 얼이 빠지더라. 형이랑 크리스티네의 모습에서 시선을 돌릴 수도 없었어. 가슴이 내가 처음 사람을 죽였던 그날보다 심하게 뛰었어, 진짜, 너무 아플 만큼. 바짝 조여진 숨을 쉬기가 곤란할 정도로. 그런데 크리스티네가 아니었나봐, 그런 확신이 왔어. 왜냐면 내 시야에 크리스티네는 존재감 흐리게 사라지고 점점 형이 내 눈에 가득 들어차서 형밖엔 안보였거든. 이대로 계속 있다가는 누군가 뜯어낸 내 심장을 토해버릴 것 같았어. 그랬다간 정신을 잃고 그대로 난간 밖으로 떨어졌을걸? 그래서 내 방으로 도망쳤어. 달려가다 어린 시종 하나가 내 어깨에 부딪혀 넘어졌지만 신경 쓸 겨를이 있나, 정신없이 내 방으로 들어가 의자에 앉아 터질 것 같은 머리를 싸맸어. 다리도 떨었던 것 같아. 진정 시키려고 두 눈을 꾹 감았는데도 온통 빨갛게 달궈진 내 몸은 진정될 기미가 없었어. 꼭 그날의 감각이 되살아 나는 기분이었어. 그러니까,


내 숨이 언제 편안해졌냐면, 그 떨림의 와중에 문득 내가 형의 손에 이끌려 처음 사람을 죽였던 그날 형의 모습이 다시 떠오르고 나서야. 내 기억 속 형의 뺨에 튄 시퍼런 피가 점점 제 색을 찾아 붉게 변했어. 아주 새빨갛게. 정원에 핀 빨간 장미 속에 형이 잠겨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그래, 그때 형은 새빨간 피에 젖어있었던 거야! 내 감정이 드디어 제 색을 찾기 시작하자 심장의 고동도 깊은 곳에서 들끓는 울렁거림도 이해 할 수 있게 됐고, 그리고 다시 떠올린 그때의 형은 그저 단순한 형이 아니게 됐어. 나 그때 형에게 반해버린 거야. 나 그 이후로 계속 형을 사랑하고 있었나봐. 그걸 깨닫는 순간 숨이 편안해지더니 속이 부글부글 끓는 행복감에 나는 조금 미친놈처럼 웃었어. 앞뒤 꽉 막혀 재미도 뭔지 모르고 살아본 우리 형이 행복이란 게 뭔지 알까?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이 어떤건지 상상은 돼? 난 그때 실감했어. 머릿속에서 파삭, 하고 중요한 것 같은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가 났지만 그게 뭐가 중요해? 중요한건,

 

사랑해. 이건 내 고백을 담은 연애편지야. 


소감이 어때? 이 편지를 읽고 있을 때쯤의 형의 표정이 궁금해. 아닐 수도 있겠지만 궁금하니까 아마 형이 이 편지를 읽는 순간에 나는 어디선가 또 형을 몰래 지켜보고 있을지도 모르겠어. 형의 표정이 보이는 곳일까 아니면 실루엣만 보이는 저 먼 발치에서 발만 동동 구르고 있을까? 형이 편지를 내려놓는 순간에 형 앞에 짜잔, 하고 나타날지도 모르겠는걸. 뭐, 지금으로선 어떻게 할지 잘 모르겠다. 


보통 이런 연서엔 좀 낭만적이고 낯간지러운 말들도 적지 않나? 형에게 이런 편지를 쓰게 될 줄 알았더라면 마이어 선생님의 작문수업과 슈미트 선생님의 문학수업을 좀 더 잘 들어둘 걸 그랬어. 그랬더라면 좀 더 멋지게 쓸 수 있었을 텐데. 사실 마무리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그러니까 그런 비슷한 흉내라도 내고 이 편지를 마칠게.


(무어라 두 줄 정도가 적혀있지만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인지 여러 겹의 줄이 사납게 덧그려져 있어서 읽을 수 없었다.) 제길, 못하겠다. 형. 나 형이 좋아. 형에게 입 맞추고 싶고, 형을 안고 싶어. 난 형에게 때묻지 않은 순수한 연정을, 욕정을 품고있어.  



sincerely you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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