깼다. 쾅쾅쾅! 문짝이 부서질 것 같은 소리가 났다. 이제 막 겨우 잠에 든 참이었던 빅터 하스는 얼굴을 잔뜩 찌푸려 이불 안으로 몸을 바짝 웅크렸다. 쾅! 쾅! 소리가 더 커졌다. 저 빌어먹을 나으리께서는 손쓰기도 아까운지 발로 차는 것이 분명했다. 빅터는 잔뜩 웅크렸던 몸을 한숨과 함께 허탈하게 풀었다. 지친다는 듯 눈을 떴다. 이불을 벗겨내고 부스스 일어났다. 그는 어깨에 부서져 내릴 달빛도 들지 않는, 밤이 오롯이 어둠뿐인 곳에 살았다. 빅터는 잔뜩 피로한 듯 일어나 어둠속을 기어 현관을 향해 비척비척 걸었다.
“시원한 거 아무거나 좀 내 와.”
설마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만, 어쩜 저 뻔뻔함마저 예상에서 한 치 벗어남이 없다. 빅터는 흐트러진 머리를 뒤로 쓸어 넘기며 질린다는듯한 표정을 지었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제 등뒤로 빅터가 마른 한숨을 쉬거나 말거나, 이글 홀든은 제 집으로 드나들 듯 현관 앞에 선 빅터를 밀치고 들어왔다. 철없는 애들이나 할 것처럼 아주 오래되어 낡은 소파에 풀썩 뛰어들어 누웠다. 소파 꺼지는 소리가 빅터가 한숨 쉴 가치도 없다는듯 대신 탄식하는 것 같았다. 아직도 현관에 오도카니 서서 한심하게 쳐다보고 있자니, 깍지 낀 두 손을 베개 삼아 머리 뒤로 받친 그가 말했다. “기다리게 할래?” 그는 이 모든 것이 당연하다는 듯 굴었고, 의무가 없는 빅터는 꼭 선택권이 없는 사람처럼 굴었다. 수명이 다해 등이 희미한 거실 불을 켜고선, 낡은 부엌을 향해 움직였다. 시원한 것 이라고 한다면 마침 그가 저번에 왔을 때 남겨두고 간 캔맥주가 하나 남아있다. 아마 1주일이 되었다. 1주일 만이다. 피로함이 한층 더 짙어진 느낌이다.
쭈그려 앉아 냉장고 문을 연다. 캔맥주가 있는 자리는 뻔하지만, 굳이 찾는 척 둘러보며 쓸데없이 시간을 써본다. 매번 이렇게 요란을 떨지 않아도 알아서 열어줄테니, 제발 적당히 하라는 말을 그는 늘 귓등으로 흘려버렸다. 그는 빅터의 말을 듣지 않는다. 그는 절대 빅터가 필요로 할 때에 나타나지 않는다. 물론 빅터 하스의 생각 따위 안중에도 없는 그가 그것을 알고 그럴 리는 만무하겠으나, 어떻게 알고 꼭 지쳐 잠드는 것마저 고된 업業같이 느껴질 때 불쑥 들이닥치곤 했다. 그나마 오늘같이 새벽 2시라면 제법 양호한 시간이었다. 기특할 것이 없어 그딴 것이 기특했다. 가장 아래칸에 얌전히 서있던 캔으로 손을 뻗은 후 접은 무릎을 폈다. 탕, 냉장고 문이 다소 신경질적으로 닫히는 소리는 솔직히 조금 같잖다. 초라하고 하잘 것 없다. 어쩌겠는가. 빅터는 꺼내든 맥주를 들고 그의 앞으로 가 섰다. “자.” 섬약한 그림자가 제 얼굴을 덮은 것을 눈치 챘는지 이글이 눈을 떴다. “아. 땡큐.” 대답은 건성이다.
이글은 건네받은 맥주캔을 뺨 위로 가져다 올렸다. 차가워라. 아주 작은 탄성이 튀어나왔다. 마시려고 했던 것이 아님을 깨닫고 나서야 빅터는 이슬이 묻어나기 시작한 맥주캔을 대고 있는 그의 오른쪽 뺨이 벌겋게 부어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디서 싸우고 오는 것이야 늘 일상인 그라지만, 이글이 세기의 유산마냥 자랑스러워하는 얼굴에 대놓고 맞았다는 흔적을 달고 온 것은 처음이었다. 어쩌다 그렇게 됐는지, 누구한테 맞았는지 조금 궁금했다. 빅터는 소파 앞에 무너지듯 털썩 주저앉았다. 발목을 겹쳐 접은 무릎을 두 팔 가득 껴안았다. 안녕? 잘 지냈어? 별 일 없었어? 안부 인사는 있어본 적이 없었고, 궁금한 것이 있다면 늘 빅터의 몫이었다. 빅터는 머리 누일 곳이 필요한 사람처럼 무릎 위로 머리를 기대곤 눈을 감아 물었다.
“이번엔 누구랑 싸웠어?”
“아. 싸운 건 아니고.”
“…….”
매사 건성인 그는 우습게도 대답만큼은 꼬박꼬박 해주었다.
“내가 전에 백이면 백 다 넘어온다고 말해준 거 있지?”
그리고 3초 가량이 더 지나서야 빅터는 생각났다는 듯 아, 하고 작은 소리를 냈다. 빅터는 첨언을 바라지 않았으나 이글은 굳이 제 목소리로 상기시켜주겠다는 듯 쓸모없는 친절을 베풀었다.
“당신, 죽은 우리 엄마를 닮았어.”
“…….”
“여자들이란게 의외로 순진해 빠져서, 분위기만 잡아주면 기가막히게 먹힌다니까. 촌스럽긴.”
그는 빅터 하스가 아플 수도 있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한다. 물론 그가 그 말로 인해 아플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이글 홀든은 빅터 하스에게 관심은 있지만 호기심은 없다. 사실 이글이 조금만 더 신경을 기울인다면 그에게 어머니가 없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언제고 아무 때나 찾아와도 사람 흔적 없는 집에 빅터 혼자 남아 살아서는 안 되는 사람처럼 지키고 있었으니까. 이글에게 무어라 말하려던 빅터는 입을 꾹 다물었다. 어차피 이글 홀든이 제 어미의 존재에 대해 안다고 해도 크게 달라질 것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글에겐 빅터의 기분이나 감정 따위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래서 빅터는 그냥 물어보던 거나 계속 묻기로 했다.
“그게 왜?”
“클래식이 클래식인 이유가 다 있어. 하필 그 방법에 된통 당한 여자였던 거지.”
세상 남자새끼들 애미는 다 뒤졌냐는데, 어후……. 내 뺨을 후려친 여자는 그년이 처음이었어. 이글은 그렇게 말을 덧붙였다.
“더 맞아도 싸.”
내가 더 때려 줄 수도 있고 말이야, 그 말을 삼키며 빅터는 느릿하게 뻑뻑한 눈을 느리게 끔뻑였다. 그래, 어쩐지 오늘은 여자 향수 냄새가 옅더라. 분이고 향수고 얼마나 쳐바른 여자들과 살을 섞고 온 것인지, 이글이 달고 오는 냄새들 때문에 괜히 먹은 것 없는 속이 뒤집어 진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조금 낫네. 묻어나는 향내가 없다고 하여 빅터가 비집고 들어갈 여지가 있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조금, 낫네. 사랑에 빠지면 쓸데없고 유치한 질투를 한다. 빅터는 이글과 하룻밤을 보낸 술집에서 만난 얼굴도 모르는 여자를 질투했고, 돈을 주면 성기도 빨아주는 저급한 창녀를 질투했다. 그 역한 향수 냄새에 질투했다. 이글 홀든을 만나기 전까지는, 저가 계집 같은 질투를 하게 될 거라고는 한 번도 상상도 해본 일이 없다.
대화가 길게 갈만한 사이는 아니었다.
흔들어도 시원해지는 것도 잠깐 뿐, 이제 소용이 없다. 부어오른 뺨을 문대던 맥주캔이 조금 미지근해졌다. 미지근한 맥주만큼이나 최악은 없다, 이런 건 마시기도 별로다. 그냥 가만히 대고 있는 것도 이글은 손을 떨어뜨리듯 놓아 맥주캔을 바닥에 두었다. 툭. 갈아끼울 때가 되었는지 희끗하게 빛나던 전등이 파르르 떨기라도 하듯 위태롭게 깜빡였다. 어지럽게 흔들리는 천장을 끔뻑끔뻑 바라보던 이글은 제 머리맡 아래에 앉은 빅터에게로 눈을 흘긋 돌렸다. 늘어난 런닝 아래 푹 고꾸라뜨린 목덜미가 눈에 들어왔다. 손끝이라도 가벼이 스치면 살갗이 벌어져 피라도 흐를 것 처럼 연하다. 곧 부서질 듯 연약해 보이던 어깨가 사내랍시고 나이를 찾아 조금씩 여물기 시작했다. 피곤한 모양인지 빅터는 머리를 뒤로 쓸어 넘긴 채 팔을 지지대삼아 머리를 기댔다. 한 손에 꽉 들어올 것 같은 손목. 가느다란 손가락 사이에 걸린 은발이 이글의 목구멍을 간지럽혔다. 물잔에 술이 왈칵 넘치듯 그가 생각났다. 그래서 이글은 몸을 비틀어 세웠다.
손을 뻗어 뺨을 건들자 빅터는 흠칫했다. 이리 보라는 듯 겨우 손끝에만 힘을 주었을 뿐인데도 빅터는 주인의 말을 잘 알아듣는 영리한 애완견처럼 고개를 돌렸다. 가만히 올려다보는 눈동자에 이글이 히죽 웃었다. 빅터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꼬맹아.”
“왜.”
“넌 우리 형을 닮았어.”
간지럽게. 뺨에 닿았던 손끝이 그림을 그리듯 내려갔다. 살이 내린 그의 뺨을 지나 훤하게 드러난 목덜미를 쓸었고, 쇄골을 문대듯 미끄러진 손이 앞이 벌어진 런닝 안으로 쑤욱 들어왔다. 왼쪽 가슴에 살짝 솟은 돌기를 손가락으로 가볍게 퉁, 튕기자 빅터는 또 몸을 퍼뜩 움츠렸다. 이런 건 처음이었다. 단순한 손길이 스친 것 뿐인데도 포식자 앞에 꼼짝도 하지 못하고 서있는 기분이었다. 빅터는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아무렇지 않은 척 하고 있지만 아마 그는 눈치 챘을 것이다. 왼쪽 가슴을 덮은 손의 손가락 두 개가 빅터의 유두를 가볍게 비틀었다. 빅터는 입술 안을 살짝 짓씹었다.
이글이 여자의 냄새를 듬뿍 묻히고 오는 날이면 빅터는 아주 막연히 상상해보기만 했다. 아직 풋내도 덜 가신 서툰 소년은 그가 자기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잠든 사이, 가장 어둡고 습한 방구석에 몸을 구겨넣곤, 이제 막 여물기 시작하는 제 몸을 홀로 만지고, 헤집고, 포식하는 그를 상상하며 끙끙 신음하곤 했다. 끈적하게 젖은 손을 볼 때 마다 자괴감이 몰려왔다. 그것은 꽤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으나 그렇다고 해서 제 맘대로 안 되는 것도 아니었다. 감각한 적 없는 그의 살냄새가 애가타는 까닭이다.
다른 한 손이 내려오며 빅터의 뺨을 감쌌다. 나른하게, 이런 일이 없었다. 이글은 꼭 입을 맞출 것처럼 고개를 느른히 숙였다. 그가 나와 잔다면. 얼굴이 가까워지자 그의 체취는 이런 것이었구나, 하루이틀 본 얼굴이 아닌데도 그제야 처음으로 알 수 있었다. 숨결이 뺨에 닿았다. 입술이 가까워져 이제 막 닿기 시작했을 때 빅터가 입술을 달싹였다. 빅터 하스는 이글 홀든에게 궁금한 것이 많았다. 오물거리는 입술 끝이 스쳤다.
“죽었어?”
이글은 대답할 가치도 없다는 듯이 히죽 웃었다.
“아니.”
그는 빅터가 가슴 아파할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사람이었다. 아주 잘 살아있지. 그리고 입술을 맞물렸다.
백이면 백 다 넘어간다는 그 뻔한 수라는 것을 아는데도, 심지어 그의 형은 죽은 사람이 아닌데도, 아니 어느 여자가 넘어갈까, 애초부터 형을 닮았다는 소리는 유혹을 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말이 아님을 아는데도 속절없이 넘어가고 만다. 빅터는 눈을 감았다. 입술을 벌렸고 젖은 혀가 불쑥 들어오자, 빅터는 손을 뻗어 그의 목덜미를 감았다. 척척한 소리 속에 숨을 섞었다. 받아줄 이 없이 오갈 데 없는 마음이 스스로 생각해도 하찮고 가여우나, 그를 감당할 의무가 없는 빅터는 꼭 선택권이 없는 사람처럼 밤새 신음했다.
다무<이글<빅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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