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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phers/text

[이글다이]

  

다이무스 홀든이라는 이름이 낯설지는 않았다. 실제로 대면해본 적 없는 그의 존재는 누구 덕에 익숙하다 못해 가끔은 지겹기까지 했다. 하지만 존재가 익숙하다는 것과 인연이라는 것은 별개의 이야기였다. 까미유 데샹은 의사 대 환자로의 관계로도 다이무스 홀든을 마주한 적이 없었다. 아마 앞으로도 딱히 마주칠 일이 없지 않을까 막연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얼마 전부터 조만간, 그것도 아주 근시일 내에 다이무스 홀든을 만날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얼마 전에 이글 홀든이 그를 찾아 다녀간 까닭이다.


현실은 기특하게도 기대를 벗어나지 않았다. 심지어 다이무스 홀든은 그가 상상한 그 모습 그대로 까미유 데샹을 찾아왔다. 사실 이렇게 너무 뻔한 이야기는 재미없다. 어쩌면 이렇게 예상을 벗어나지 않는 따분하고 고리타분한 관계일 수 있을까 하면서도, 원하는 그림이 딱 맞아 떨어졌을 때의 미미한 희열에 까미유는 조소를 띄웠다. 그래, 까미유 데샹에게 있어서 홀든은 수준 낮아 거들떠보지도 않을 삼류 소설처럼 재미없고 진부하고 유치하기 때문에 재미있다.


“무슨 일이지?”


까미유는 이미 그가 자신을 찾은 이유를 알고 있었지만, 선심을 써 모르는 척 해주듯 제법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다이무스는 형제의 관계를 누군가 아는 것을 원치 않을 것이고, 까미유는 겨우 이정도로 싱겁게 끝내긴 아쉬운 촌극을 좀 더 지켜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까미유는 까만 색안경 너머로 다이무스를 훑어보았다. 여간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었던 것인지 마른 입술을 얼마나 짓씹어댔으면 다이무스의 아랫입술에서 피가 났다. 그는 이따금씩 저도 모르게 어금니를 악물어 윽, 하고 앓는 소리를 냈다. 급하게 온 모양인지 혈색이 좋지 않은 얼굴을 하고서 밭은 숨을 색색 내쉬었다. 까미유는 당연하다는 수순으로 다이무스의 허리춤으로 시선을 내렸다. 시선이 닿은 곳, 다이무스는 자신의 왼손을 천으로 덮어 오른손으로 꽉 움켜쥐고 있었다. 피에 푹 젖어버려 제 색을 잃어버린 천에서는 핏방울이 뚝뚝 떨어졌고, 바닥은 이내 비린내 나는 점들로 얼룩졌다. 더러워. 바닥에 떨어지는 불순물의 불쾌감에 까미유는 살짝 미간을 찡그렸다. 그 표정이 위화감이 들만한 것은 아니었다. 부상을 입은 환자를 보면 누구나 으레 그런 표정을 짓듯이.



*



‘나랑 결혼해줄래?’


이글 홀든은 살짝 오른 술기운에 멍청하게 웃으며 테이블 위로 작은 상자를 내밀었다. 잔속의 얼음이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냈다. 까미유가 언더락잔을 가볍게 흔들며 무심하게 쳐다보자 이글은 케이스의 뚜껑을 열었다. 불빛에 작게 반짝이는 반지는 여성의 것이라기엔 제법 컸다. 때깔이 꽤나 좋았다. 디자인을 보아하니 꽤 돈을 들였을 성 싶었다. 하는 일도 없이 놀고먹고 떠들기만 할 줄 아는 백수인 줄 알았더니 패물을 고르는 안목도, 부담 없이 들이붓는 거액의 돈도, 역시 귀족 집안 아들인 게 거짓은 아닌 모양이었다. 설마 이런 농담이 통할 거라고 생각하진 않겠지. 흥, 까미유는 작게 코웃음 쳤다.


‘쪼개긴. 반하지 말라고.’


임자 있는 몸이니까. 그렇게 말한 이글은 스스로도 씨알 같지 않은 소리임을 아는지 킬킬 웃었다. 그러면서도 꼭 초조한 모양새로, 무언가 잊은 것을 떠올리듯 검지로 테이블을 탁탁탁탁 두드렸다. 아. 이글은 이내 작은 탄성과 함께 주머니를 뒤적였다. 그는 품에서 까미유에게 내민 것과 똑같이 생긴 케이스 하나를 더 꺼내들었다. 당연하다는 듯이 케이스 안에는 반지가 들어있었는데, 크기와 모양 역시 이글이 까미유에게 내민 것과 똑같이 생겼었다.


이글은 아무렇게나 지어낸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이제 막 꺼내든 케이스의 반지를 꺼냈다. 이글은 제가 산 반지를 보기만 해도 흐뭇한 모양인지 속없이 흐흥, 하고 히죽히죽 웃고는 제 왼손 네번째 손가락에 끼웠다. “짠!” 이글은 자신만만하게 펼친 손을 까미유에게 자랑처럼 내밀었다. 까미유는 상투적이고 의례적이고 성의없는 반응도 해주지 않은 채 술만 홀짝였다. 그리고 이글도 처음부터 딱히 그의 호들갑스러운 반응이 필요하진 않은 모양인지 다른 한 손으로 턱을 괴고, 새침한 계집마냥 꿈결에 젖은 표정으로 제 손가락을 바라 볼 뿐이었다. 이글이 아무리 생각 없이 사는 놈이라고 해도 왼손 약 반지의 의미까지 모를 놈은 아니었다. 혼자 사고 혼자 끼우고서 혼자 만족하는 약혼반지라. 그의 손가락을 감싸고 있는 고리가 단순한 치장의 목적이 아니라면 의미에는 아무런 가치가 없었다. 이글도 그것을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청혼하게?’

‘어.’

‘다이무스한테?’

‘어.’

‘받아준대?’


꿈에 젖은 것처럼 손을 바라보던 눈이 까미유의 말에 두어번 느릿하게 끔뻑였다. 잠에서 깨어 현실로 돌아오는 것처럼 멍청하게 올라가있던 입술 끝이 천천히 내려왔다. 결국 이글은 입맛 버렸다는 듯 쯧, 짧게 혀를 차고서 흥미가 다 떨어진 표정으로 테이블 위의 담뱃갑을 더듬었다. 담뱃갑을 털어 마지막 남은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물고 싸구려 라이터의 불을 켰다. 숨을 길게 마시자 담배 끝에 벌건 불이 붙었다. 짜증난다는 듯 라이터를 테이블 위로 성의 없이 툭 던지고선 입에 문 담배를 손가락 사이에 끼웠다. 꼭 드러눕기라도 하듯 몸 뒤로 훅 젖혔다. 참았던 숨을 내뱉었다. 후우-. 이내 목울대 너머로 담배연기가 어룽거리더니 이글의 어깨와 가슴이 들썩였다. 그는 조금 미친 사람처럼 웃었다. 큭…큭큭큭…… 하, 참……. 하. 하하. 하하하하하! 취한 것인지 취하지 않은 것인지 구분가지 않았지만 이글 홀든에게서 제 정신을 바라는 것만큼 시간낭비인 것도 없었다. 귀가 따가운 소음이 익숙하긴 하지만 달갑지는 않았다. 심지어 혼자서 조용히 즐기고 있던 휴식시간에 멋대로 불쑥 찾아오지 않았던가. 하지만 까미유는 이글에게 타박을 주지도 않았고 그를 진정시키지도 않았다. 소용없음을 아는 까닭이다. 그리고 그것이 그를 멈추는 정답이었던 것처럼 발작 같던 웃음이 뚝 끊겼다. 길게 늘어진 담뱃재가 바닥에 툭 떨어졌다. 이글은 잔소리를 들어 짜증이 난 사춘기 소년처럼 미간을 찌푸리며 눈을 감았다.


‘……끼워 줄 수 있어.’


동문서답. 다시 느리게 뜬 눈의 시선은 초점을 잃었다. 나직한 목소리는 체념에 가까웠다. 까미유는 그때 직감했다. 조만간 다이무스 홀든을 만날 수 있을 거라고.



*



까미유는 다이무스의 왼손을 받았다. 예상대로 약지가 있어야 할 자리가 휑했다. 까미유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어쩌다가.”라고 물었지만 다이무스는 잠시 망설이다 불한당에게 당했다고 얼버무릴 뿐이었다. 그런 것 치고는 손가락이 잘려나간 단면과 그 주위는 반항의 흔적이라곤 찾아볼 수 없이 깔끔했다. 얌전히도 당해줬군. 머리가 좋은 줄 알았는데 말을 지어내는 재주는 없는 모양이었다. 세계 제일의 검사가 손가락만 베어갈 뿐인 변태 불한당에게 당했다, 라. 엉성하기 짝이 없고 애초에 말이 되지 않는 변명이라 생각했지만, 이글을 가리켜 불한당이라 하는 것도 변태라 하는 것도 생각해보면 틀린 말은 아니었다. 거짓말은 하지 않는 타입인가, 농처럼 생각했다. 변명하는 모습으로 보건대 다이무스 홀든은 숨기고 싶은 것은 있는 모양이었다. 어쩌지. 이미 다 알고있는데. 흐음, 까미유는 낮게 숨을 쉬었다. 손가락이 잘린 팔이 가늘게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고통을 참느라 간헐적으로 내는 앓는 듯한 신음이 귀에 스몄다. 이런 신음이라면 이글이 갈증이 날 만도 하겠군. 순간 까미유는 이글이 도발하듯 입에 올리는 이름과 그 존재의 밭은 숨소리가 떠올랐다. 이런. 스스로 같잖은 홀든과 같은 취급을 하고 싶지 않았다.


“손가락은?”


까미유는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물었다. 다이무스는 대답했다.


“……없다.”

“의사는 신이 아니야. 없는 것 까지 만들어 주진 못해.”

“알고 있다.”

“이대로 아물면 다시 붙이지도 못할 텐데, 괜찮은가?”

“괜찮다.”


그대로 이글에게 주고 싶었던 건 아니고? 까미유는 입 밖으로 꺼내는 대신 머릿속으로 그렇게 물었다. 당연히 미련도 없는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어쩌면 이글 혼자 궁상맞게 삽질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병신.

병신들.



*



“사랑해.”


벌써 몇 번이나 내뱉어 닳고 닳은 고백은 감정을 닮아있다. 가치 없고, 추잡하고, 잔인하다. 감히 고결하신 다이무스 홀든께서 이글의 그런 마음을 받아들일 리 없었다. 그것은 값비싸고 아름다운 보석을 가져와도 마찬가지였다. 보석의 값어치를 아는 여느 계집이라면 마음이 흔들릴 법도 했고, 약아빠진 계집이라면 흔들리진 않더라도 그것만을 탐하고자 할 수도 있지만 다이무스 홀든은 그런 천한 것들과는 달랐다. 그리고 그와는 다르게 이글은 구정물이 축축한 천한 바닥에 스스로 뛰어든 남자였다. 욕망이 가장 최고의 가치이고 그것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해도 괜찮은 세계 속에 그는 살았다. 그래서 이글은 저가 준비한 반지를 거절당하자 예상이라도 했던 것처럼 당연하게 칼을 꺼내들었다. 아직 어린 그는 혼자만 사랑하고 혼자만 고백하고 혼자만 거절당하고 혼자만 슬퍼하기에는 억울해서, 당장 무엇이라도 가져야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가능하다면 그 자리를 무언인가 영원히 대체할 수 없는 것으로.


“이글!”


다그치는 목소리 뒤에 끄아아악, 매서운 비명이 울렸다. 피가 뚝뚝 떨어지는 다이무스의 손가락을 손에 들고 이글은 만족한 듯 서늘하게 웃었다. 이글은 자신의 사랑이 평생 거부당할 것을 알고 있었다. 그걸 알면서도 제 마음을 접고 싶지 않았고, 마음먹는다 하여 접어질 마음도 아님을 이글은 알았다. 그의 생은 태어난 순간부터 죽어서 까지도 저주를 받은 것처럼, 그리 사는 것에 불만은 없었다.


자신이 끼워 줄 수 없다면. 그런 손가락 따위는 없는 편이 나았다.


집으로 돌아온 이글은 꼭 의식을 치르기라도 하듯 달빛이 내리는 창가에 섰다. 신의 존재를 믿는 것은 아니었다만 그는 흉내내고 싶은 것이 많았다. 다른 평범한 사람들럼. 어느 종교의 결혼식에서 보았던 것을 어렵지 않게 떠올린 이글은, 한 손에 다이무스의 약지 손가락을 들고 손이 그대로 있다면 그의 검지가 있을 만한 자리를 가늠해보았다. 그리고 있다면 그곳에 있을 검지의 끝 즈음에 자신이 끼고 있는 것과 똑같이 생긴 반지를 가져다댔다. 성스러운 의식의 시작이었다. 그는 속삭였다.


“성부의 이름으로.”

중지가 있을 법한 끝에 옮겨놓고서는

“성자의 이름으로.”

그리고 드디어 다이무스의 손가락에 제가 준비한 약지를 끼우며 말했다.

“성령의 이름으로.”


다이무스의 손을 다정히 붙잡고 끼워줄 수 없었기에, 반지는 그렇게밖에 제 구실을 할 수 없었다.


그날 밤 이글은 다이무스의 손가락을 품에 꼭 안고 잠들었다. 그리고 어쩐 일로 평소에 잘 꾸지도 않는 꿈을 꾸었는데 그는 살아서 그렇게 난잡하고 행복한 꿈은 처음 꾸었다. 그는 꿈에서 밤새도록 그의 형과 허겁지겁 키스하고, 그의 몸 곳곳을 주무르고 핥았으며, 부푼 살덩이를 맞대고, 정을 통했다.


하지만 다음날 아침 일어났을 때에 곁에 있는 것이라곤 품에 가득 차 꿈에서 함께 밤을 지새운 그의 형이 아니라, 한 손에 잡기에도 너무 작고 초라한 손가락 하나뿐이라. 이글은 그 손가락마저 발이 달려 도망갈세라 퍼뜩 쥐어 가슴으로 당기고는 현실을 외면하듯 간만의 꿈을 떠올리려 애썼다. 그랬더니 아랫도리가 금세 팽팽하게 부풀어 올라 속옷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고, 움켜쥔 손을 흔들며 습한 숨을 훅훅 뱉었다. 곧 파정한 후 색색대며 손가락을 쥔 손을 펼쳐보았다. 저질스런 만족감에 그는 히죽 웃었다. 아침 해가 유난히 눈부셨다. 햇살에 먼지가 빛처럼 부유했다. 이글은 그 빛무리 아래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초라한 아침이었지만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이 손가락은 아무도.



*



이글이 까미유의 앞에 다시 나타난 것은 아마 사흘 정도가 지나고 났을 때였다.


“어때?”


끼워 줄 수 있다고 했잖아. 이글은 기세등등하게 반지를 끼운 다이무스의 손가락을 내밀었다. 그것은 까미유에게 시체를 자랑하는 것과 다르지 않았고, 당연한 이야기로 시체는 썩는다. 살점에서는 악취가 나기 시작했다. 까미유는 불쾌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저대로 썩어서 살점이 흐물대고, 썩은 물이 뚝뚝 흘러내려 덩그러니 반지만 남게 되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그 다음에는 어떤 짓을 할까. 그것도 제법 궁금했으나 그것보다 당장 오물이 풍기는 악취가 더 불쾌했기에 까미유는 그에게 작은 선물을 주기로 했다.


이제는 꼭 자기집인양 소파에 멋대로 풀썩 누워 뒹굴 거리는 그를 뒤로하고 까미유는 집안을 뒤적였다. 아마 저 손가락 크기에 맞는 유리병이 분명 어디 있었다. 평소 정리정돈을 잘 하는 습관 덕에 까미유는 그가 원하는 것을 쉽게 찾을 수 있었고, 다시 자리를 옮겨 그 안에 투명한 포르말린을 채웠다. “이글.” 주려고 불러도 대답도 반응도 없기에 그의 배 언저리에다가 낡은 유리병을 멋대로 던졌다. 툭, 배에 무엇인가 떨어지고 나서야 흥미가 일었는지 이글은 고개를 슬쩍 들어 배꼽 근처에 떨어진 것을 보았다. 물이 든 병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 수가 없어 “뭔데?”하고 묻자 까미유는 턱짓으로 서랍 쪽을 가리켰다. 수많은 표본들이 썩지 않고 벽장에 진열되어 있었다. “아~. 땡큐.” 이글은 기쁘게 받아들곤 다이무스의 손가락을 유리병에 담갔다. 고맙다는 말은 별로 바라지 않았다. 그의 선물은 선물이라기보다 창녀에게 주는 화대의 개념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이글이 주고 있는 소소한 기쁨의 대가였다. 홀든의 이야기는 싸구려 창부의 몸값, 딱 그만큼의 값어치가 있었다.


이글과 까미유의 관계를 우정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둘은 제법 자주 만나긴 했지만 친밀감은 없었다. 첫만남도 기억나지 않았다. 그만큼 서로가 서로에게 하잘 것 없었기 때문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자주 만나는 것은 이글의 이유가 컸다. 그는 늘 일방적으로 까미유를 찾아왔다.


이글은 까미유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조잘대는 것을 좋아했다. 기실 자신의 이야기라기보다는 다이무스 홀든을 향한 지고지순한 금단의 사랑으로 포장한 집착의 이야기에 가까웠다. 상담을 바라는 태도는 아니었고, 그는 그저 자신의 감정을 자랑할, 아니 배설할 쓰레기통이 필요한 모양이었다. 그는 귀족의 체면에, 조금 더 정확히는 그의 형의 체면 때문에 어디 가서는 하지 못할 이야기들을 술술 떠들어댔다. 말도 많아서 그간 저걸 어떻게 참았을까 싶었다. 물론 까미유가 그럴 만큼 입이 가볍지도, 그들의 이야기가 유별나게 재밌는 것도 아니지만 어디 가서 쉬이 떠들어버리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하지만 이글은 크게 상관하지 않았다. 정확한 이유를 그에게서 들은 적은 없으나, “아. 그러고 보니 그 녀석 말이야.” 이글이 이따금씩 일부러 까미유의 속을 긁기라도 하듯 입술에 올리는 이름에 어렴풋이 예상하고 있을 뿐이었다. 동류취급 하고 있다고. 이글은 그 이름의 존재와 자기 사이의 일을, 그 관계를 알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것이 까미유의 약점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만 썩 유쾌하진 않았다. 뒷조사를 어지간히 한 모양이군, 동일시하는 싸구려 취급이 까미유는 가끔씩 불쾌했다.


이글은 꼭 평생을 찾아 헤맨 보석을 가진 사람처럼 반지 낀 손가락을 담근 포르말린 병을 불빛에 비춰보며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실컷 찾아와놓고는 어지간히 푹 빠진듯, 행복에 겨운 자신의 모습을 자랑하고 싶은 듯 그의 앞에서 대놓고 다이무스의 손가락을 보는 것 말고 이글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런 한심한 모습을 보면서 까미유는 막연히 다이무스 홀든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지,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지가 궁금했다. 괜찮은 변명거리도 없을텐데. 소문이 자자한 홀든은 생각보다 훨씬 별 것 없었고, 같잖았다.


그렇게 할 만한 양심이 있지도 않을 것 같은 이글은 매우 놀랍게도 까미유를 찾아가 자신이 한 짓과, 자신이 앞으로 할 짓에 대한 변명거리를 찾아가곤 했다. 그것이 일반 상식과 도덕성에 비추어 말도 되지 않는 것들뿐이었지만. 까미유는 의외로 그런 그의 필요를 매우 훌륭하게 충족시켜주었다. 굳이 건수를 만들어 내고 싶은 사람처럼 이글은 먼저 그의 형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았고, 까미유가 적당히 대꾸해주는 말이나 진심 없는 간사한 조언을 해주면 그는 원하는 대답을 얻었다는 듯 깊이 공감하는 척 했다. 대게 그 시작은 이글의 필요로 이글이 먼저 트는 편이었다만 까미유가 홀든에게 바라는 기대감은 컸다. 그는 더욱 흥미로운 치정극을 만들어 낼 수 있다. 그래서 가끔씩은 까미유가 먼저 이글의 도화선에 불을 붙이곤 했다. 예를 들면 지금처럼.


까미유는 이글의 왼쪽 손목을 휙 낚아채어 들었다. 이글이 뭐하냐는 듯 올려다보자 까미유는 다이무스의 손가락에 끼인 것과 똑같이 생긴 반지가 끼워져 있는 이글의 약지를 접었다. 이글의 손이 이제 왼손 약지가 없는 그의 형과 비슷한 모양이 되자, 손가락이 사라진 자리 위를 까미유 자신의 약지로 덮었다. 그대로 자신의 손과 이글의 손을 깍지껴 잡았다. 두 손이 빈틈없이 맞물렸다.


“잘 맞는군.”


이것 봐. 까미유는 이쪽을 주목하라는 듯 이글의 약지 위를 덮은 자신의 약지를 가볍게 까딱댔다. 그 자리에 반지를 끼워줄 수는 없겠지만, 빈 자리를 채워줄 손가락은 얼마든지 있다.


낯간지럽게 맞물린 손을 다소 뚱하게 바라보던 이글은 이내 “허.”하고 웃었다. 이글은 까미유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바보가 아니었다. 까만 선글라스 너머의 눈이 어떤 빛을 하고 있는지 훤히 보였다. 녀석의 평판이 어땠더라를 생각해보면 이런 시꺼먼 속내를 저 혼자만 알고 있다는 것이 가끔은 약이 올랐다. 하지만 딱 같잖은 그 정도가 끝이었다. 이런 놈인걸 알기 때문에 이글은 매번 그를 찾아왔다. 편하고, 부담이 없지. 그의 음습한 속을 알면서도 그대로 놀아나 주는 것은 그 장단이 제법 맘에 들기 때문이었다. 정작 자신부터 흥분감에 속이 끓어 참을 수 없어지니까. 이쪽 역시 장단을 맞추어 주고 있다는 것도 저 똑똑하고 비열한 의사 놈은 알고 있을 것이었다. 그리고 이글이 꼴리면 그가 바라는 것 보다 더 깊은 밑바닥을 보여줄 지도 모른다는 것도. 둘은 잘 통했다.


까미유는 잡은 손을 떼어내고선 불결한 것이라도 만진 듯 손수건으로 손을 꼼꼼하게 문대어 닦았다. 손수건은 그대로 쓰레기통으로 던져 버렸다. 우습다. 흥, 같잖은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병신. 병신들.

 





 





오우..정말 의식의흐름...낙서처럼 슥삭슥삭

성부, 성자, 성령~은 약지 반지 찾아보다가 나온 기독교 예식의 반지 끼워주는 모습? 방법? 써먹어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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