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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phers/text

[이글다이] 낭만적인 병은 없다


*하나하키 기반, 설정 날조 있음.





0

어깨 아래로부터 팔이 감각을 잃고 덜렁거릴 때부터 직감했다만, 구태여 확인받는 것만큼 또 잔인한 것은 없었다. 지장은 없겠으나 생활하는 데 약간의 불편함이 있을 수 있다고 했다. 검을 쥘 수는 있을 것이라 했다. 다만 검을 다신 쓸 수는 없을 것이라 했다. 


1

술에 절어 널브러진 꼴이 청승맞기 그지없었다. 비라도 온다면 한심하기 짝이 없는 그 꼴이 제법 더 볼품없겠거니, 생각하면서도 다이무스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이글은 고개를 제대로 가누지 못했다. 아마 등 뒤의 벽이 없었다면 그마저도 버티지 못하고 더러운 뒷골목의 땅바닥에 고개를 처박아 기어코 그 잘난 얼굴에 생채기를 내고, 누군가 밟고 지나간 흙먼지를 신나게 마셔대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무래도 이글은 일어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나마 기특한 것인지 이글은 자꾸만 옆으로 혹은 앞으로 휙휙 고꾸라지려는 고개를 똑바로 들기 위해 애를 썼다. 벽에 뒷머리를 기대고 고개를 확 꺾어 턱을 치켜들거나, 곧 쓰러지기 직전인 옆머리를 비비적대며 버티는 꼴이 술주정뱅이 거지의 꼴과 다름이 없었다. 이글은 미간을 잔뜩 찌푸려 흩어지는 초점을 쥐어짜듯 그러모았다. 금방이라도 뒤돌아 떠나버릴 것 같은 사람에게 동정을 구걸하며 붙잡는 것처럼, 이글은 저를 내려다보는 다이무스의 눈을 맞추고 있었다. 그런 저가 스스로도 우습고 초라했던 모양인지 이글은 흥, 흐흥, 바람 빠지는 소리와 함께 역한 단내를 뱉으며 히죽히죽 웃었다. 

“한심하지?” 
“…….” 
“나 같은 놈들 사는 거야 똑같잖아. 어쩌겠어?”

한심하군. 평소라면 이글이 묻기도 전에 벌써 그렇게 한마디를 던지고 이런 볼썽사나운 치는 동생으로 둔 적 없다는 듯 자리를 떴을 다이무스는 그 자리에 꼭 발이 빠져버린 것처럼 멀뚱히 서서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해서 아무 노력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는 축 늘어져 먼지가 뒤엉킨 이글의 오른팔을 외면하는 것에 필사적이었다. 술에 붉게 달아오른 얼굴을 힘없이 이죽이며 이글은 말을 이었다. 

“이젠 남은 것도 없는데.” 

이글이 그렇게 말하며 스르르 눈을 감아 내리자, 다이무스는 꼭 보아선 안 될 것을 본 사람처럼 코트 주머니 속에 숨겨두었던 손에 힘을 주었다. 청승맞은 그 꼴에, 왜 하필 기어코 그 어느 날에 저를 향해 ‘사랑해’라고 퍽퍽한 고백을 뱉었던 그 날 이글의 표정이 떠올랐는지. 그 이유에 적당한 단어를 고르기 위해 다이무스는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형을 너무 사랑해. 그 말을 약도 술도 심지어 담배까지 종일 손에 대지 않고 말하는 거라며, 금단증상에 떠드는 헛소리라고 치부하지 말라던 이글은 그렇게 덧붙였다. 어차피 아닐 것을 알기 때문에 제 마음을 받아 줄 것을 바라지도 않는다고. 그냥 속으로만 썩이기엔 불현듯 속이 너무 답답하여 터질 것 같았기에 말하는 것이니 잊으라고 말한 이글은 시꺼멓게 굳은 다이무스의 표정을 보고 ‘담아 두지 마. 구질구질한 거 딱 질색이니까.’ 그렇게 헛헛하게 웃고는 뒤돌아 털레털레 자리를 떠났다. 하지만 이미 들어버린 것을 잊으라고 한들, 담아두지 말라고 한들 그렇게 되겠는가. 다이무스는 기억하고 있었다. 그때 제게 사랑을 고백하던 이글이 처음으로 초라해 보였던 것도, 버틸 것 없이 쓸쓸해 보이던 표정도. 그래서 지금 평생을 손에 놓아본 적이 없었던, 검을 잃어버린 검사의 표정이 그때와 똑같은 것도 다이무스는 알았다. 

다이무스가 한 무릎을 꿇어 자세를 낮추어 앉았다. 제 얼굴 위에 드리운 그림자를 알아챈 모양인지 이글이 다시 고개를 휘적대곤 눈을 떴다. 밝은 날 보았으면 투명하게 빛나고 있을 그의 푸른 눈동자에 자신의 그림자가 들지 않았다. 다이무스는 이글이 이런 곳에 널브러져 있는 것은 마음에 들지 않으나, 가로등 불빛이라거나 달빛 같은 것들이 들 틈이 없는 후미진 골목길인 덕분에 그의 눈에 비친 제 모습을 보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이무스는 아랫입술을 허옇게 셀 정도로 짓씹었다. 어렵사리 주머니에 숨겨두었던 손을 꺼내 이글의 턱 끝을 가볍게 잡아당겼다. 다이무스의 손짓대로 고개가 돌아가자 상황이 우스운 모양인지 흐흥, 이글의 가슴이 작게 들썩였다. 숨을 고르려고 했던 걸까. 이글은 술내 가득한 숨을 후욱 뱉고는 기가 차다는 듯 말했다. 티를 내지 않으려고 한 것 같은데 목소리가 어울리지 않게 잠겨있었다. 

“담아 두지 말라고 했잖아.” 

이제 다시 검을 쥘 수 없는 막내는 남은 것이 없다고 했다. 그런 제 동생에게 남아있는 마지막 하나가 되어주고 싶다면. 다이무스는 그저 가만히 입을 맞추었다. 

나 역시 사랑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다이무스가 겨우 고르고 고른 단어는 그런 진부한 것이었다.


2

몇 가지 불편한 것을 제외한다면 이글의 생활은 그의 표현으로 팔 병신이 되기 전과 다름이 없어 보였다. 불편한 것에는 예를 들어 식사 때가 있었다. 가끔씩 오른팔과 손이 예전만큼 멋대로 움직이지 않아 포크와 칼질이 서툴러져 애를 먹곤 했다. 하지만 이글은 크게 개의치 않는 듯, 어차피 먹고 자고 싸는 거 본능인데 격식 차릴 필요 뭐 있냐며 공사장의 인부들처럼 투박하게 식사했다. 거지꼴만 아니면 됐지. 매번 그렇게 말하는 이글은 들어 올린 음식들을 테이블이나 제 옷에 흘리는 것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했지만, 저도 모르게 이따금 포크나 스푼, 나이프를 손에서 놓쳐버리면 기분 나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지금처럼. 뎅그렁. 추락하는 소리의 뒤에는 짧은 정적이 찾아왔다. 그 공기가 제 목을 죄기라도 하는지, 이글은 이를 작게 악물고 눈을 질끈 감아 곧 튀어나올 것 같은 욕을 겨우 씹어 삼켰다. 제길. 그는 이내 변덕을 부렸다.  

“속이 좋지 않아.” 

등받이에 드러눕듯 등허리를 기대곤 팔짱을 꼈다. 개나 줘버린 식사예절이었다만 다이무스는 나무라지 않았다. 다이무스는 이글의 그 말이 그냥 던지는 핑계임은 알았다. 다만 속이 좋지 않다는 것도 아주 거짓은 아님을 아는 까닭이다. 

얼마 전부터 멀쩡하다가도 불현듯 속이 불편하다며 인상을 찡그리기도 했고, 헛구역질을 참는 사람처럼 숨을 꿀꺽 삼키거나 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 감정과 정신은 어떤 식으로든 몸에 영향을 미치기 마련이었고, 그에게는 그렇게 나타나는 모양이었다. 늘 세상 모든 것이 제멋대로였던 녀석이 겨우 제 손 하나 제멋대로 하지 못한다는 것이 여간 답답하겠는가. 이제 더는 칼을 잡을 수 없다는 사실에 스트레스가 속을 여간 들쑤시는 것이 아닌 모양이었다. 검사는 팔을 잃은 지 오래되지 않았다. 평생 겪을 일이 없을 것이라 생각했던 감각에 적응하려면 더 오랜 시간이 필요할 것이었고, 적응한다 해도 쉽지는 않을 것이다. 하루아침에 잃어버린 삶 뒤로 오는 것이 어떤 세계인지 생각해본 적 없는 그는 이제 막 미지의 과도기에 발을 디딘 참이었다. 이대로 무너져 내릴 이글 홀든을 허하지는 않으나, 아무렇지 않은 척 견디고 선 그 모습이 언제고 무너질 듯 불안하다 하여 그를 감히 나약하다 할 수 있겠는가? 그러한 이유들로 이글의 변덕을 헤아린 다이무스 역시 이내 식사를 마쳤다.

“음? 좀 더 먹지 않고?” 

둘 다 서로 지나치게 눈에 띄는 하잘것없는 배려였다. 

“충분하다. 그만 일어나지.” 

다이무스가 식사를 마무리 짓고 자리에서 일어나자 이글은 하, 실소를 뱉은 뒤 따라 일어났다. 

“그래. 다리까지 병신은 아니니까. 나 일어나는 건 잘해.” 
“이글.” 
“하하, 농담~. 이거 말고도 잘하는 거 많아. 일단 집으로 가면,” 

그렇게 능청스레 형의 곁에 붙어 허리를 감싸 안고 어깨에 턱을 기대 걸으며 다이무스의 귓가에 낮게 속삭였다. 

“침대로 갈까?” 

늘 이런 식이었다. 

이러한 몇 가지 일상에서 불편한 것들과 이따금 관통당한 어깻죽지를 파고드는 고통을 제외한다면, 이글의 요즘은 평화롭다 못해 행복에 겨워 보일 지경이었다. 그는 사랑하고 있는 지금이 너무 행복해서 어쩔 줄 모르는 티를 내지 못해 안달이 나 있는 사람처럼 굴었다. 원래도 과시욕이 있는 성격임은 알았으나 그것에 어찌나 애를 쓰는지, 때로는 그 모습이 다이무스로 하여금 애처로워 애먼 입맛이 쓰게 느껴질 정도로. 특히나 이글의 유난은 근래 누구에게서부터 시작되는지 알 수 없이 전염병처럼 퍼지기 시작한 꽃을 토하는 병이 번진 후에 더 극성맞아졌다.

감정은 몸에 영향을 미치기 마련이라고 했던가. 이제 막 학계에 ‘하나하키병’이라는 이름을 올린 이 질환의 발병원인을 이글은 감정소모라고 말했다. 짝사랑이 깊어지면 꽃을 토하는 병. 짝사랑이 깊어지면 꽃을 게워내는 증세도 심해져 심할 경우 죽음에 까지도 이를 수 있으며, 현재까지 밝혀진 완치 방법은 사랑이 이루어지는 것뿐인 그런 병이라 했다. 단순히 손을 잡고, 입을 맞추고, 살을 섞는다 하여 나아질 병이 아니었다. 사랑의 허기를 채우지 못하면 짓무른 꽃잎들을 갈 곳 없는 감정과 함께 토해내는 것밖엔 할 수 있는 것이 없는, 바라는 것조차 없는 지고지순한 순애보라 하더라도 애정으로 보답 받지 못하면 결국 죽을 뿐인 외로운 병. 그것이 아니라면 병이 더욱 더 깊어져 죽어버리기 전에 품은 연정을 죽일 것을 종용받는. 그래서 그 병은, 그네들의 사랑은 더욱 보잘것없다. 

이글과 다이무스는 그 병에서 자유로웠다. 그리고 이글은 그 병에 걸려 위액에 녹아내린 꽃을 토해내는 이들을 비웃기라도 하듯 꽃을 한 아름 사다가 다이무스에게 선물하는 것을 좋아했다. 꼭 다이무스에게 아니면 혹은 그 누군가에게 보라는 것처럼. 자신의 사랑은 이처럼 싱그럽고 아름답게 피어있다고. 꽃의 선물도 하루 이틀이지 이제는 둘 곳도 없이 점점 감당하기 힘들어지는데 이글은 선물한 후의 일은 제가 알 바가 아니라는 듯 질리게도 선물했다. 오늘도 어김없이 식사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눈에 보인 꽃집에 들러 세심하게 고르고 고른 꽃의 포장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카운터에 팔을 기대어 삐뚜름하게 선 이글이 말했다. 

“아, 얼마 전에 라디아가 찾아왔었어.” 

이글이 그저 몸을 달래기 위해 마음 없이 만나던 여자 중 하나였다. 다이무스로서는 그다지 떠올리고 싶지는 않은 여자였다. 어느 날 갑자기 다이무스가 근무하고 있는 은행에 말 그대로 쳐들어와 당신의 막내 동생 문제로 할 얘기가 있다며 찾아온 그녀는 누가 어떤 시선으로 보든 개의치 않았다. 그녀는 은행 입구에서부터 다이무스를 찾으며 크게 소란 피우더니, 은행 한 가운데서 따박따박 소리쳤다. 당신이 홀든의 차기 가주라니 알 것은 알아야 하지 않겠느냐고, 자신이 이글 홀든의 아이를 가졌으니 홀든에서 어떻게든 책임을 져 주었으면 한다고. 덕분에 한동안 홀든도 좋지 않은 소리로 시끄러웠다. 다행인지 임신은 사실이었지만 이글의 아이는 아니었고, 불행까진 아니게도 둘이 동침한 것은 사실이었다. 

“다른 놈 씨 받은 년이.” 

그런 여자였다. 홀든 부인이 되고 싶었던 그녀는 그런 방법밖엔 몰랐다. 그리고 일방적인 애정은 그녀를 기어코 시궁창 바닥의 바닥으로 처박았다. 악취뿐인 세계였다.

“다짜고짜 내 앞에서 토를 했어. 입덧인 줄 알았더니 꽃이더라고.”

하하! 미친년. 옷만 버렸지 뭐야. 이글은 기가 차다는 듯 웃었다. 이글의 말이 제법 불편하기는 하였으나 감정이 불쾌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너와 그녀가 다를 것이 무엇인가, 너도 나를 사랑한다고 했으면서 그녀와 자지 않았느냐, 타박하지도 않았다. 이글의 행동과 저 언사가 무례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답다면 그다웠다. 그는 원래 연합의 망나니라는 수식어답게 경박한 이었으니, 게다가 어차피 그녀 혹은 그녀들과 하룻밤을 지새웠던 것도 모두 둘이 연인이라는 관계 이전의 이야기 아니었던가. 한심하기는 하였으나 섭섭하지도 억울하지도, 애석하게도 이글이 바라는 것 같은 질투도 나지 않았다. 다이무스는 그 찝찝한 기분을 현실이 중요하기 때문이라고 정리했다. 

“뭐. 불쌍하긴 했어.” 

아아, 땡큐. 이글은 꽃집 점원이 건넨 장미꽃다발을 곧바로 다이무스를 향해 내밀었다. 부러 향기가 짙은 것으로만 고른 것처럼 향기가 지독하게 진했다. 정말로 연민이 들기는 하더냐. 딱히 물을 필요성도 느끼지 못한 질문을 홀로 곱씹고 있자니 이글이 채근했다. 

“안 받을 거야? 나 팔 아파.” 

꽃다발을 내민 오른손이 떨리고 있었다. 고의가 아닌 것은 알지만 가끔은 그 말이, 그 손이 꼭 협박 같았다. 어쩌면 저것도 조금 전의 식사 때 놓쳐버린 나이프처럼 바닥으로 나동그라질까봐 다이무스는 서둘러 꽃다발을 받아 들었다. 다이무스는 값을 치르고 있는 이글의 등 뒤에서 받아든 꽃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문득 이미 녀석에게서 잔뜩 받은 꽃들이 어떻게 되었던가 되짚어 보았다. 아무리 싱그럽다 한들 애석하게도 꽃은 진다. 져버린 꽃은 썩고, 운이 좋아 마른 꽃은 바스러지기 마련이었다. 

계산을 마친 이글이 다이무스가 다소 멍청하게 들고 있던 꽃다발을 고쳐 쥐어주었다. 이글은 눈을 내리뜨고 낮게 고개를 숙이곤 꽃무덤 위로 가벼이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말했다. 

“사랑해.”


3

달이 유난히 밝은 밤이었다만 창문에는 암막 커튼이 고집처럼 쳐있었다. 초 하나 밝혀두지 않은 깜깜한 자의적 밀실에서 살덩이가 치덕대는 소리가 질척했다. 숨길 생각이 없어 보이는 난잡한 숨소리는 한 사람만의 것이었다. 다이무스는 길게 늘어져 뺨을 간질이는 이글의 머리카락이 가려운지 이따금 고개를 돌려 피하기만 할 뿐 목석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늘 그랬듯이. 이글이 짓궂게 “좋아?”라거나 그저 “다이무스.”라고 부르는 말에도 대답하지 않고 그저 입술을 짓씹어 고집스레 신음을 삼키기만 했다. “새침하긴.” 그는 숨소리마저 참았다. 따분하고 지겹기 그지없어 보이는 이 섹스는 어울리지 않게도 연인의 관계였다. 

다이무스는 불감증인 사람인 것처럼 제대로 느끼지 못했다. 이글이 제아무리 주무르고 물고 빨아도 쉽게 서지 않는 그의 물건이 결국 그 집요함에 항복하듯 조금씩 부풀기 시작하고 종래에 토정하여도, 그의 온몸의 신경을 훑고 지나가듯 퍼지는 감각에 쾌락이라는 이름을 붙이기는 어려웠다. 온몸에 벌레가 기어가는 듯한 불쾌감. 뒷구멍으로 정을 통해도 다른 것은 없었다. 길고 길었던 갈증에 해갈을 구걸하듯 작정하고 파고들어 오는 감각은 무자비한 폭력에 가까운 고통이었다. 이글의 성기가 빠졌다가 훅훅 치고 들어올 때마다 올라오는 역함과 헛구역질을 참으려 다이무스는 끔찍이도 애를 썼다. 차라리 모든 감각이 차단당했으면, 그렇게 바랄 때도 있었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전혀 이상할 것이 없었다. 다이무스는 그가 느끼는 것들이 연인들의 섹스에서 느낄법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다만 그 ‘연인들’이라는 말 앞에는 ‘평범한’이라는 수식어가 필요했고, 다이무스와 이글의 관계는 다른 평범한 연인들의 것과 같다 할 수 없었다. 같은 사내끼리, 심지어 피를 나눈 형제 사이가 연인의 관계가 된다는 것이 어떻게 자연스럽다 할 수 있겠는가. 평범할 수가 없다. 형제간의 관계는 명백히 이치에 맞지 않았고 도리에 어긋나있었다. 그러므로 이 연인의 시간이 고통스럽고 구역질이 올라올 것 같은 것이 오히려 당연하다고 여겼다. 나는 그를 사랑한다. 다이무스는 그 말을 관계 내내 곱씹었다.

이글은 섹스 중 중간중간 다소 저급한 말들로 다이무스에게 어떤지 물으면서도 정작 자신은 어떤지 말해주지 않았다. 다이무스는 이글이 느끼고 있는 것이 어떠한 것인지 궁금하지도 않았고, 차마 물을 낯도 없었다. 그저 만족스러웠으면 좋겠다고 바라기만 할 뿐이다. 그것은 이글이 자신과는 달리 도덕과는 거리가 멀고 쾌락을 좇는 것을 즐기는 사람이라는 것을 떠나, 그가 오랜 시간 저에게 갈증을 느낀 만큼 이글만큼은 만족하였으면 좋겠다는 애틋함이 더 컸기 때문이다. 의무감에 가까운 그것을 애틋함이라 포장할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어쨌든 스스로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다고 말하는 그에게 마지막 남은 단 하나는 다이무스 홀든 뿐이었으므로. 서로 사랑하며 맺은 관계이나 죄악감은 둘씩이나 가질 필요는 없었다. 그것은 다이무스 홀로 견뎌내면 되는 것이리라, 다이무스는 그리 생각했다. 

눈조차 익지 않을 만큼 어둠을 꼼꼼하게 여민 공간에서조차 다이무스는 여차하면 눈을 감아버렸고 덕분에 이글이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 알 도리가 없었다. 이 역시 딱히 생각해본 적 없었다. 않았다기보다 그는 모멸감에 가까운 감정들을 버티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벅차 궁금할 겨를조차 없었다는 말이 맞을 것이다. 

다만 그런 와중에도 오늘 이글의 행동이 무엇인가 평소와 다르다는 것은 느낄 수 있었다. 이글은 처음 침대 위에서 입을 맞추었던 때부터 아주 가끔씩 무엇인가 참아내듯 불쾌한 신음을 냈고, 다이무스를 탐하는 것에 있어 망설임이 없었던 그를 무엇인가가 방해하고 있는 것처럼 자주 멈칫하곤 했기 때문이다. 감이 좋지 않았다. “이글,” 무리하지 말라 이르려 관계 중 처음으로 입을 열어보았으나 “됐어.” 이글은 들키고 싶지 않은 것을 숨기듯 그의 말을 자르며 다급히 입을 맞추었다. 어쩐지 조금 초조해 보이는 것 같기도 하다, 라는 생각을 할 틈조차 이글은 주지 않았다. 성이 난 듯 안으로 급하게 치받아 들어온 탓이다. 생각할 틈도 주지 않겠다는 듯 정신없이 쳐올리는 허릿짓에 당장의 고통을 감내하는 것도 버거웠다. 

하지만 오늘의 이글은 분명 무엇인가 이상하다. 숨도 쉬지 못하게 몰아붙이는 탓에 신음을 더는 참지 못하고 아, 작은 비명과도 같은 탄성을 내뱉었을 때였다. 이글이 갑자기 멈추었다. 

“……이글.” 

느닷없이 찾아온 고요에 다시 한 번 그의 이름을 불러보았지만, 대답이 없었다. 결국, 관계 내내 붙들듯 감고 있었던 눈을 조심스레 떴다. 이글은 어둠 속에서만큼은 빛나지 않는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채로 고개를 푹 수그리고 있었다. 그는 수명을 다해버린 고장 난 시계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숨을 참고 있는 모양인지, 직전까지 잔뜩 달아올라있었던 숨소리마저 없었다. 그 모습이 마치 어둠에 잠식당해 살아있지 않은 그림자처럼, 그런 생각이 들자 처음으로 그의 얼굴을 확인하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타액으로 젖은 입술이 바싹 마르는 것 같았다. 관계 중에도 잠잠하던 심장이 고동치기 시작했다. 

이글의 머리카락을 거두기 위해 시트를 바짝 움켜쥔 손에 힘을 풀었을 때였다. 손을 들어 올리려 하자마자, 이글은 갑자기 다이무스의 어깨를 단단히 누르고 있었던 한 손을 떼어내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리고 

“욱.”

이글은 다이무스를 확 밀치듯 자신의 몸을 빼내고선, 황급히 몸을 틀어 침대 아래로 허리를 고꾸라뜨렸다. 욱. 우웩. 우웨엑! 

토악질 소리에 깜짝 놀란 다이무스는 상체를 일으켰다. 그뿐이었다. 다이무스는 등을 두드려주지도, 왜 그러냐는 말도 하지 못했다. 우웨에엑!! 꼭 한계에 다다른 자가 죽기 직전에 비명을 지르는 것처럼 소리가 끔찍했다. 한번 시작한 구토는 한참을 멈출 생각을 않아 보였다. 토사물이 바닥에 질퍽하게 퍼지는 소리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역겨움은 저만 견디면 된다고 생각했다. 혼자만 감내하면 괜찮을 줄 알았는데 버티고 있었던 것은 자신만이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다이무스가 뻣뻣하게 굳어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동안 속을 한참 게워내던 이글은, 이제 잠깐 진정이 된 모양인지 핏대가 붉게 선 목을 움켜쥐고 켈록켈록 기침을 했다. 기침이 멎고 나서는 숨을 쌕쌕 몰아쉬었다. 하아, 하아. 섹스의 흥분과는 다른 숨소리였다. 이글의 몸이 불안하게 오르내렸다. 숨이 낮게 깔렸다. 다이무스는 불길한 제 감이 들어맞지 않길 바라며 겨우 입을 열었다. 

“이글, 괜찮…….” 
“……어째서?” 

쇳소리 나는 목소리는 배신감에 젖어있었다. 이글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다이무스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표정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내려앉은 어둠에도 불구하고, 원망에 벼려진 안광은 자신의 턱밑에 날을 세우고 있는 것처럼 선명했다.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글이 꽃을 토했다. 문득 깨닫고 나자 소름이 돋았다. 이글은 하나하키의 원인을 감정소모라 했었다. 그럴 리가 없다. 이글이 소리 없이 물었다. 날 사랑하잖아. 다이무스는 아무런 변명도 하지 못했다. 혼란스러운 것은 마찬가지였다. 

어째서?


4

그날 밤 이글이 떠난 후로 일주일이 지났다. 

라디아는 기세등등하던 지난번과는 달리 조심스럽게 다이무스가 근무하는 은행을 찾아왔다. 이번에도 다이무스를 찾아온 그녀는 저번처럼 그를 직접 만나는 대신 은행창구에 앉아있던 행원을 심부름꾼처럼 부리고선 소리 없이 은행을 유유히 빠져나갔다. 그런 라디아의 방문 사실 조차 알지 못한 채 자신의 위치에서 업무를 보고 있던 다이무스는 라디아를 응대한 행원으로부터 쪽지를 하나 받았다. 작정하고 써 내린 듯 종이가 움푹 팰 정도로 꾹꾹 눌러쓴 글씨는 꼭 명령 같았다. 

「이글 홀든의 이야기로 할 말이 있어요. 은행 앞 카페에서 기다리고 있죠.」

이름이 쓰여 있지는 않았으나 글씨 위로 목소리가 덧씌워진 것 같아 그녀임을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었다. 다이무스가 누구인지 밝히지도 않은 그 서신에 응할 생각을 한 것은, 일주일 째 아무런 소식이 없는 이글의 이름이 눈에 걸렸기 때문이었다. 

약속된 카페에 도착했을 때 라디아를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쪽지를 건네준 직원이 ‘수배라도 떨어졌나. 굉장히 수상해 보이는 여자가 전해달라고…….’라고 말했고 카페 내에 대놓고 수상해 보이는 여자는 하나뿐이었기 때문이었다. 다이무스는 모자와 스카프, 선글라스로 자신을 꼭꼭 숨긴 그녀의 앞으로 걸어갔다. 연락을 받은 것이 네 시간 전이니, 못해도 네 시간은 기다렸을 것이었다. 얼굴을 가리느라 그 긴 시간을 기다리는 동안 시킨 커피는 입에 대지도 않은 모양인지, 테이블 위 카푸치노는 전혀 줄지 않은 채 거품만이 푹 꺼져 볼품없었다. 다이무스는 말없이 그녀의 맞은편에 착석했다. 

‘이번에는 무슨 용건인가.’라고 말하기도 전에 라디아는 오랫동안 자신의 얼굴을 감아두었던 붉은색 나염 스카프를 조심스레 풀었다. 조금씩 드러나는 얼굴이 여성에게 가혹하다 싶을 만큼 엉망이었다. 입술은 터진 채로 퉁퉁 부어있었고, 입가에 부러 떼어내지 않은 듯한 피딱지가 들러붙어 있었다. 스카프를 다 풀러 내린 그녀는 얼굴을 반쯤 가린 선글라스를 다 벗지는 않고, 반쯤 위로 가볍게 들기만 했다. 얼핏 보이는 광대가 시퍼렇게 멍들어있었고, 한쪽 눈은 뜨지도 못할 만큼 부어있었다. 이런. 다이무스가 미간을 찌푸리자 라디아는 이만하면 됐다는 듯 선글라스를 다시 내렸다. 얼굴이 저 정도라면 장갑에 숨은 손과 옷가지 안의 몸도 여간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서신에 적혀있던 것으로 보아 이글의 흔적이라 말하려던 모양이지. 이글을 신뢰하는 것은 아니나―사실 그가 사고를 치고 다니는 것이 더욱 자연스럽게 느껴졌다―그녀에게는 책임을 빌미삼은 거짓말을 한 전적이 있었다. 다이무스가 무어라 말을 꺼내기 전에 준비하듯 숨을 한 번 고르자, 그녀가 그의 말을 가로채듯 입을 달싹였다.

“팔 병신 새끼가 때리는 건 신명 나게 잘 때리던데요. 덕분에 애도 떨어졌어.” 
“……그 일은 안타깝게 됐군. 이글은,” 
“그 새끼 꽃을 토했지?” 

라디아는 히죽 웃었다. 어쩐지 말하는 발음이 조금 새더라니 앞니가 깨져있었다. 그래. 그날 밤 이글은 꽃을 토했다. 그것을 어찌 알고 있는 것인가, 다이무스가 다소 흠칫한 표정으로 라디아를 쳐다보았다. 약간의 당황함이 옅게 어린 그 모습이 제법 만족스러웠던 모양인지 라디아의 어깨가 조금씩 들썩였다. 흥. 흐흐흥. 

“진짠가 보네? 하. 그렇게 생지랄을 다 하더니! 하. 하하하!” 

라디아는 참을 수 없이 유쾌하다는 듯 깔깔대며 웃기 시작했다. 얻어맞은 탓에 웃는 것도 힘든지 그녀는 손으로 가슴을 누르며 웃음을 참아 숨을 견디기도 했다가, 그런 고통 따위 별것 아니라는 듯 또 숨이 넘어가도록 웃었다. 좀체 이해하기 힘든 불쾌한 공기 속에서 다이무스는 차분히 상황을 파악하기 시작했다. 이글, 라디아 그리고 하나하키병. 그러고 보니 얼마 전 라디아가 이글을 찾아가 그의 발치에 꽃을 게워냈다고 했다. 

아. 병은 전염된다고 했던가. 

라디아가 이글의 앞에서 꽃을 토해냈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도 이글에게 병이 옮을 것이라는 걱정은 하지 않았었다. 서로 사랑하고 있다 믿어 의심치 않았기 때문에, 숨을 짓누르는 죄악감과 자괴감은 그저 금기를 깨버린 자가 응당 등에 이고 가야 할 것이라 믿고 있었기 때문에. 그랬기에 그날 밤 꽃을 토하는 이글의 모습은 다이무스에게도 굉장한 충격이 아니었던가. 그의 믿음을 배신하듯 이글은 꽃을 토했다. 병은 아무에게나 전염되지 않는다. 이글은 하나하키의 발병원인인 짝사랑을 그렇게 불렀다. 감정소모. 향기가 지독했던 빨간 꽃송이 위로 입을 맞추던 이글의 모습이 떠올라 어금니를 악물었다. ‘사랑해.’ 배신당한 것은 이글이었다. 심장이 후벼지는 기분이었다. 

카페 안에서 자신들을 향해 꽂히는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고 미친 사람처럼 경박하게 웃어젖힌 라디아는 눈물마저 나는 모양인지, 장갑을 낀 손으로 선글라스 안을 더듬어 눈물을 훔쳤다. 그녀는 숨을 고르며 여진처럼 남은 웃음을 털어냈다. 하…하아, 하하……. 

“있지이……하하, 난 당신이 싫어.” 

당신만 없었더라면. 그런 가정은 무의미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글을 사랑하는 그녀에게는 거부당한 책임을 전가하고 마음껏 미워할 수 있는 대상이 필요했다.

“당신한테 직접 확인받고 싶어서. 치료비도 좀 받아야겠고. 어차피 나도 곧 뒤지겠지만, 이왕 죽을 거 곱게 죽으면 좋잖아.” 

어느 밤, 다짜고짜 그녀를 찾아간 이글은 그녀가 영문을 파악하기도 전에 우악스레 그녀의 머리채를 휘어잡았다. 짐승 새끼를 끌듯 창가로 질질 끌고 가는 동안 라디아가 뭐하는 짓이냐며 발버둥 쳤으나 이글은 전혀 들리지 않는 척 굴었다. 머리채를 잡은 손에 힘을 주어 들어 올렸더니, 여린 체구가 생각보다 쉽게 들렸다.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쾅! 쾅! 쾅! 부숴버릴 기세로 창문에 머리 세 번을 가져다 박았더니 창문 유리에 금이 가고 이마가 찢어져 피가 흘렀다.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으려는 그녀를 바닥에 내리꽂듯 내동댕이쳤다. 그녀는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철푸덕 쓰러졌다. 뭘 잘했다고 고약하게 숨 쉬는 꼴이 짜증이 나서, 살려고 벌벌 기어가는 몸을 발로 콱 밟아 눌렀다. 억, 소리도 내지 못하고 반사적으로 몸을 퍼뜩 튕기는 그녀를 발로 뒤집어 배를 걷어찼다. 한때는 그를 붙잡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마지막 희망이기도 했던 배가 걷어차이자 그녀는 몸을 옹크리며 비명을 질렀다. 악! 

죽여야 성이 풀릴 것 같았다. 이글은 쉬지 않았다. 어찌나 세게 쥐었는지 뼈마디가 허옇게 센 주먹으로 그녀의 얼굴을 내려치고, 바르작거리는 그녀의 머리를 밟아 뭉갰다가, 또 걷어차고, 쉴 새 없이 폭력을 행사하는 동안 이글은 저주를 퍼붓듯이 욕지거리를 뇌까렸다. 씨발. 씨발년이. 너 때문에! 폭력이 그 강도를 더해갈수록 라디아는 직감했다. 기특하게도 병이 잘 옮아주었구나! 배신감에 어찌할 줄 모르는 저 꼴을 보자니 저주스런 병이 걸리길 잘했다는 기특함마저 느껴졌다. 그래서 그녀는 맞으면서도 웃었고, 그것이 이글의 화를 더욱 부추겼을 것이다. 무자비한 폭력은 그 끝을 모르는 듯 했다. 라디아는 이글이 제풀에 지칠 때까지 기꺼이 맞아주었고, 이글이 제집을 부수는 것을 내버려두었다. 

마지막으로 이글이 바닥에 쓰러져 널브러진 라디아의 멱살을 잡아 올렸을 때 두 시선이 마주쳤다. 핏발이 선 안구에 그득하게 맺혀 차마 떨어지지도 못하는 눈물이, 그 꼴이 하도 우스워 보고 라디아가 물었다. 

‘어때?’ 

고통과 함께 희열이 번졌다. 라디아는 히죽 웃으며 그의 뺨에 피 섞인 침을 뱉었고 이글은 마지막으로 그녀의 턱주가리를 주먹으로 내리꽂곤, 허탈한 손을 놓아버렸다. 치마 아래 새하얀 다리 사이로 피가 흘렀다. 이글은 서글프게 짓씹었다. 

‘좆같아.’

“아주 으스대는 꼴이 눈꼴셔서 죽는 줄 알았거든. 그 새끼가 뭐랬는줄 알아요?” 

그녀는 냉소하며 계속 읊조렸다. 

“당신이 자길 사랑한대. 웩. 근친이라니, 더럽다고 했더니 더럽고 불쌍한 건 꽃이나 토하다 이제 곧 죽을 나래. 그런데 어쩌지? 가엽기도 해라! 병신새끼 불쌍해서 동정하는 줄도 모르고 잘난 척이나 하더니 그놈도 곧 뒤지게 생겼네!” 
“…….” 
“이글이 토해낸 꽃은 어땠어요? 예쁘고 향기로웠어? 그럴 리가. 다 뜯어지고 짓물러서 위액에 뒤범벅된 꼴이 어떻게 예뻐? 꽃인 줄로 알아보는 게 신기하지. 차라리 예뻤으면 글 좀 쓰신다는 나부랭이들처럼 나도 가련한 척 낭만에 취했을 거야. 그런데 어떡해? 그래 봐야 토사물이야. 그게 어떻게…… 어떻게, 꽃으로 보이다니.” 
“…….” 
“모양도 냄새도 역겹지. 그놈이나 내 사랑에 딱 어울리네.” 

라디아의 자조적인 목소리에조차 다이무스의 사랑은 없었다. 차라리 꽃이라도 게워낼 수 있다면. 다이무스는 속이 조금 울렁이는 것 같았으나 애석하게도 역류하는 것은 없었다. 머리가 지끈대며 아팠다. 초라하게 떠나버린 이글의 뒷모습이 떠오르자 숨이 답답하여 한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다. 그가 믿고 있었던 것들은 모두 거짓이다. 연민을 사랑으로 착각할 수 있을지언정 그것은 절대로 사랑이 아니다. 그리고 다이무스 홀든은 차마 혈육을 사랑할 만큼 모질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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