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툭, 툭. 시비를 걸듯 검 끝으로 자신의 칼집을 건드리자, 이글은 유치한 도발이 같잖지도 않다는 듯 입꼬리를 비죽였다. 옆으로 고개를 삐뚜름히 기울이자, 당연한 수순인 줄 알았다는 듯 그도 같은 방향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한쪽 입꼬리를 당겨 말하는 것도 그와 닮아있었다. 뱀처럼 눈을 가늘게 접으며 그는 말했다. 네가 되어야 가질 수 있을까, 아니면 가져야만 네가 되는 걸까. 뭐, 어느 쪽이든지 상관없어. 결론만 괜찮으면 됐다는 주의라서. 너처럼. 이글 홀든의 말에 이글 홀든은 기가 차다는 듯 웃으며 대답했다. 꿈도 크셔, 꼴 보아하니 너 참 거지같이 뒤지겠구나.
2.
세 번째 만남은 부슬비가 스산하게 흩어지는 밤이었다. 아니, 그것을 다시 만났다고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이글은 앞머리를 뒤로 쓸어넘기며 퍽퍽하니 한숨을 내쉬었다. 꼴좋다. 흥, 하고 비웃어 주려는데 어째 표정이 제 맘대로 되지를 않았다. 그래서 이글은 억지로 웃는 것을 그만 두었다. 푸스스, 비가 시원하게 내리지도 못하는 처연한 밤이었다. 얼마 전에 만났을 때만 해도 기세 좋은 척 떠들어대던 그는, 생이 끝나 추락하여 수많은 이들의 발에 짓이겨진 초라한 낙엽처럼 어느 좁은 골목길 위에 나뒹굴고 있었다. 터벅, 터벅. 그의 머리맡으로 걸어가 무릎을 접어 쭈그려 앉았다. 뺨 위로 어지럽게 엉겨 붙은 은발을 하나, 하나 쓸어 넘겨주며 이글이 말을 건넸다. 야. 대답이 없었다. 눈가에 들러붙은 머리카락도 거두어주었다. 그는 눈도 감지 못한 채로 잠들어있었다. 이글은 입술 안쪽을 짓씹었다. 내가. 답답하다는 듯 고개를 수그린 채 이마를 짚었다. 거지같이 뒤질 거라고 했지. 이마를 문지르는 손끝이 허옇게 셌다.
몇 번 맞추지 않은 검의 합에서 이글은 그가 머지않아 죽을 것을 알고 있었다. 자신과 똑같은 모습을 한 그가 낯선 땅에 홀로 떨어진 존재마냥 불안하고 위태로워보였다면 그것은 근거 없는 감인가, 혹은 진짜의 자신감인가. 둘 다일 것이라고 생각했고, 의심할 것도 없이 분명 제 손에 죽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진짜 이글 홀든으로서의 존재의 증명이라 생각했고, 그 쓰레기에 합당한 처분이라 생각했고, 존재는 아무리 가짜라 한들 기분 나쁠 정도로 이글 홀든의 모습을 하고 있어서 타인의 손에 죽는다는 것은 상상만으로도 제 자존심까지 상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글은 성미가 느긋한 편이 아니었고, 녀석은 오래 두고 보고 싶을 만큼 예쁜 구석이 있지도 않았다. 곧이다. 어차피 자신이 결정에 의해 조금 더 길고 짧아질 명줄, 당분간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내버려 둬볼까 하는 마음이 든 이유는……. 모르겠다. 그 또한 아마 존재는 자신의 모습을 닮아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3.
그래, 빌어먹을 너는 나를 너무 닮았다. 다이무스가 떠난 후 이글은 제 손으로 찢어버린 편지 조각들을 주섬주섬 주워 모았다. 징그러운 단어들로 나열된 그것이 꼴 보기 싫어 발기발기 찢어발긴 주제에도 바닥에 초라하게 나뒹구는 저 꼬락서니가 속에서 뒤틀렸기 때문이다. 조각난 편지를 손에 함부로 움켜쥔 채 애꿎은 뒷목을 문질렀다. 속은 척 나가 볼 수도 있는 거잖아. 그것은 원망이라고 하기에는 욕심이었고, 여유라고 하기에는 조금. 초라했다.
우리 형은 이런 깜찍한 짓 안 좋아해. 두 번째 만남이었다. 다이무스 대신 메트로폴리스 안개지역으로 간 이글은 클론 이글의 앞에서 움켜쥔 주먹을 느릿하게 폈다. 후두두, 종이 조각들이 채 바닥으로 떨어지기도 전에 바람에 나부끼며 흩어졌다. 클론 이글은 한때는 자신의 편지가 쓰레기가 되어 나뒹구는 것을 무감한 표정으로 바라보더니, 이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벽에 허리를 기대었다. 큭큭. 그는 바람 빠지듯 웃는 소리에서 기분 나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서느렇게 자신을 노려보는 그의 눈을 빤히 마주했다. 저렇게 열등감이 들어찬 눈빛은 해본 일이 없다. 이글은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 입을 열었다.
이런이런. 가짜야, 형의 동생인 나도……. 클론 이글이 말허리를 잘라먹었다. 그래, 다이무스의 동생인 너도 고작 그 정도지. 감히 클론 주제에 여유를 부리고 있었다. 근본이 다르기 때문인지 발화되는 문장도 이글의 것과는 조금 달랐다. 형제가 아니라서 가능한 이야기를 왜 너만 몰라? 순간 말문이 막혔다. 하, 당장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하하, 기도 차지 않는 다는 듯 웃는 것 말고는 없어서, 하하하하, 이글은 실성한 사람처럼 웃었다, 하하하하! 역시 이 새끼는 살려 줄 이유가 없다, 성가시니 역시 당장 죽여 버려야겠다. 칼자루에 손을 가져다대며 숨을 짓이기듯 물었다. 왜? 밑도 끝도 없는 질문을 클론 이글은 단번에 알아들었다. 그는 지금은 별로 싸울 의지가 없다는 듯 두 손을 어깨 위로 가벼이 들며 되물었다. 너는 왜? 먼저 질문한 사람이 이글이었기 때문에, 이글 역시 클론 이글의 질문을 알아들었다. 가짜와 형제, 허나 그들은 같은 역린을 가졌으므로. 씨발. 흥이 떨어져 이글은 곧장 뒤돌아 자리를 떠났다.
너는 왜? 하필이면 똑같이 생겨서, 자문자답인 마냥 기분이 더러웠다. 글쎄. 엿같은 운명의 장난? 그렇게 떠올리며, 클론 새끼도 아마 이런 대답이나 속으로 짓뭉갰을까 생각했다.
2.
고작 이렇게 뒤져버릴 새끼가. 클론 이글의 시체를 여기저기 훑어보던 이글은, 마지막으로 그의 뺨을 한 손으로 잡아 휙 휙 돌려보았다. 흠. 별다른 외상이 없었다. 아무래도 누가 죽인 것 같지는 않아 이걸 잘 됐다고 해야 할지, 빌어먹게 됐다고 해야 할지. 어딘가 찝찝한 구석이 있는 이 기분을 설명할 길이 없었다. 이글은 고개를 틀어 눈도 감지 못한 채 죽어있는 클론 이글의 얼굴을 보았다. 언제부터 이렇게 맞고 있었던 건지, 빗방울 같지도 않은 빗물이 그의 얼굴에 내려앉아 번들거리고 있었다. 그의 눈을 덮어주려 손을 뻗었다가, 이내 멈추었다.
아마. 이글은 생각했다. 나도 곱게 죽지는 못할 거다. 검을 잡은 순간부터 그리 생각했다. 늙고 병들어 죽는 것은 책에서나 볼 수 있는 이야기일 것이라고, 내 숨은 분명 나와 누군가의 피웅덩이 속에서 지리라. 미련도 없는 삶, 어떻게 죽든지 상관은 없었다. 하지만 그가 그의 죽음에도 바라는 것이 있다면 어떤 이유로 죽었든, 어떤 처참한 모습으로 남겨졌든, 다이무스 홀든이 부디 자신의 죽음을 슬퍼하며 감은 두 눈 위로 조용히 애정 어린 입맞춤 한 번 남겨주기를. 살아서도 아닌 그 한 순간의 키스를 바라여 이글 홀든은 이 지겨운 삶을 이렇게 아득바득 살아 버티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글은 클론 이글의 머리가 향한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길이 참 길다. 쯧, 혀를 차고 클론 이글의 등허리와 다리 밑으로 팔을 밀어 넣었다. 연민인지, 읏차, 끔찍한 자기연민인지.
4.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너무 정중하여 다이무스는 밤중에 찾아온 손님이 이글 홀든일 것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문을 열자 밀려오는 한기 뒤로 이글이 또 다른 이글을 두 팔에 안은 채로 서 있었다. 안개마냥 희뿌연 빗방울이 흐르지도 못한 채 두 인영 위로 짓누르듯 내려앉아 있었다. 생각지도 못한 그림에 당황하여 저도 모르게 한 발짝 뒤로 물러나자, 이글은 아주 큰 용기가 있어야 겨우 그리 할 수 있는 것처럼 다이무스에게로 한 걸음 다가갔다. 서두르지도 못해 짧은 거리를 그를 안은 채로 아주 오래도 걸었다. 숨을 뱉기가 왜 이렇게 힘든지 모르겠다. 후들거리는 팔로 클론 이글을 내밀며, 이글이 어렵게 입술을 뗐다. 인사해. 지가 이글 홀든이라네. 부탁이 있어. 별건 아니고, 눈 좀…… 덮어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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