덜컹.
잠에서 깨는 것은 한 순간이다. 앙리는 누가 절벽에서 그를 떠밀어버리는 꿈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눈을 떴다. 갑작스럽게 쏟아진 시야에도 미간은 찌푸러들 생각을 하지 않았다. 창틀에 기댄 머리를 천천히 떼어냈다. 저 멀리 달아난 현실감을 찾기 위해 눈을 굴렸다. 날이 찬 탓인지 창문에는 성에가 끼어있었다. 가볍게 주먹을 쥔 손으로 스윽 닦아내니 차창 밖으로 풍경이 빠르게 지나가고 있었다. 흐린 하늘은 지나가는 것들에 대한 감상을 방해하기라도 하려는 듯이 비를 뿌려댔다. 툭, 투둑, 차창으로 떨어진 비가 비명도 없이 미끄러졌다. 덜컹, 덜컹. 바퀴가 구르는 소리 위로 이따금 요란한 증기소리가 길게 꼬리를 그렸다. 그제야 앙리는 참았던 숨을 길게 내쉬었다. 불현듯 한기가 들어 팔짱을 끼고 몸을 움츠렸다. 제네바로 향하는 기차 안이었다.
지나가는 풍경들은 앙리로서는 처음 보는 것들이었다. 어디까지 왔는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얼만큼의 기다림이 더 지속 될 지 알 수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다시 수면을 취하는 것이 어쩌면 가장 현명한 방법일 수도 있겠으나 꿈이 영 뒤숭숭했던 탓에 다시 잠들고 싶지는 않았다. 앙리는 괜스레 찌뿌드드한 몸을 기지개 켜고는 책이라도 꺼내기 위해 옆자리를 더듬었다. 손에 닿는 것이 없었다. 어디 갔지? 의뭉스레 오른손 아래로 향했던 시선이 자연스레 앞으로 향했다. 가방은 맞은편 자리에 놓여있었다. 자연스레 가방의 곁에 있는 인영으로 시선이 올라갔다. 고되기는 그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빅터는 팔짱을 낀 채로 잠들어 있었다. 비구름에 습한 햇살이 그를 낮게 비추고 있었다. 잠이 든 빅터를 보고 앙리는 그의 얼굴 위에서 몇 가지를 지워냈다. 가령 그의 신분이라든가, 야망이라든가 하는 것들을. 잠 든 순간만큼은 그런 것들 따위는 소용없었다. 평화에 기대어야 가질 수 있는 가장 연약하고 나약한 시간에 잠긴 한낱 인간일 뿐이다.
가방을 가져오기 위해 허리를 숙여 팔을 뻗자 딱 그만큼 가까워졌다. 혹여나 닿기라도 할까 몸을 슬쩍 피하는데, 덜컹, 차체가 흔들렸다. 반사적으로 고개가 빅터를 향해 돌아갔다. 긴장감 없는 고개가 창문을 향해 쓰러져있었다. 적어도 앙리가 지켜본 빅터는 제대로 된 수면을 취한 적이 없었다. ‘제네바’ 자신의 고향을 향한 단어와 그리로 향하는 기차에 처음 올랐을 때의 표정이 떠올랐다. 빅터에게선 많은 것을 들었지만 많은 것을 듣지 못했다. 아마 이유는 알 수 없으나 긴장감 없는 이 휴식도 그에게는 마지막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도 그 안온함을 방해하게 두고 싶지 않아 앙리는 손에 잡은 가방을 제 옆자리에 두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덜컹, 덜컹. 흔들리는 차체를 딛고 서 빅터의 옆에 앉았다.
등받이에서 살짝 떨어진 그의 등 뒤로 팔을 밀어 넣었다. 손을 펼쳐 차창에 대니 손등 뒤로 차가운 감촉이 피부 위로 스몄다. 그의 머리가 닿을 만한 곳으로 자리를 잡으니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이 콩, 머리가 그의 손바닥에 닿았다. 단정하게 정리를 잘 한 머리카락의 감촉이 제법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어딘가 간지러운 기분이 들어 앙리는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시선을 돌려 제 손에 기댄 빅터의 얼굴을 보았다. 나른하게 닫힌 눈꺼풀 위로 꿈도 꾸지 못할 만큼의 깊은 고단함이 내려앉아 있었다. 아니, 꿈을 꾸는 걸까. 빅터가 잠결에 미간을 찌푸렸다. 그 모습이 꼭 들을 사람은 잠들어 있지만 괜히 어떻게라도 달래어 주고 싶어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게끔 만들었다. 무슨 말을 어떻게 고르는 것이 좋을까, 소리로 뱉지 못할 말을 혼자서 고르고 곱씹는 중이었다.
덜컹,
차체가 크게 흔들리자 빅터의 몸이 앙리를 향해 쓰러졌다. 빅터의 머리가 앙리의 어깨에 기대어졌다. 별 것도 아닌데 저로서도 이유를 알 수 없이 찬 물이라도 뒤집어 쓴 마냥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그러다가 이내 뒷목부터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색색, 숨을 뱉는 소리가 이렇게 컸던가. 푹 쓰러진 머리가 앙리의 귓가에서 호흡하는 탓에 괜스레 숨결마저 제 몸을 스치는 것 같다. 조금……. 설명하라고 하면 사내 둘이서 이렇게는 조금 남사스러워 보이지 않겠나 하는 조금 뒤늦은 이유를 찾은 앙리는 시트를 짚은 손을 들어 올렸다. 조심스럽게 살짝 밀어 세우면 되지 않을까 하는 심산이었다. 괜히 어깨와 허리를 옆으로 빼고 손끝으로 빅터의 관자놀이를 짚었다. 힘은 얼마 들이지도 않았다, 깨우지 않게 조심한다는 것이 과연 그를 밀어낼 생각은 있기라도 한 것인지 의문이 들 만큼이었으나
“소위.”
잠긴 목소리가 앙리를 불렀다. 나쁜 짓이라도 한 사람처럼 화들짝 놀라 손을 떼어내고 등 뒤로 숨겼다. 조마조마 한 마음으로 시선을 내리자 고개가 움직였다. 앙리는 호흡을 참았다. 숨이 빅터의 뺨에 가 닿기라도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곧장 입술이라도 닿을 것 같은 거리에서 빅터가 자신을 나른한 눈으로 쏘아보며 입술을 달싹이고 있었다. 제네바행을 택한 순간 둘 사이의 계급은 무너졌으나 ‘대답은?’ 빅터는 되물었고 ‘네.’ 앙리는 얼떨결에 대답했다. 흐음……. 빅터가 길게 숨을 골랐다. 숨결이 목덜미를 간질였다. 맹수 앞에 던져진 짐승새끼마냥 앙리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순순한 대답에도 빅터는 한참을 말이 없었다. 어울리지 않게 잠꼬대였던 걸까. 시선을 데구르르 내리니 빤히 올려다보는 눈과 시선이 마주쳤다. 시선을 돌릴 길이 없었다. 저 눈빛을 회피하고 싶어 아래로 시선을 내리면 입술이 있었다. 조금 마르지 않았나, 하는 것을 감지하자 몸이 더워져 아예 고개를 돌리려는데 그 어느 날 빅터와의 첫 만남에서 빅터의 입에 올랐던 단어가 떠올랐다. 명령불복종자.
아. 너무 가깝다. 순간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빅터는 앙리의 태도가 짐짓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제멋대로군.”
“죄송합니다.”
빅터는 이내 다시 잠을 청하려는 것처럼 팔짱낀 몸을 뒤척이더니 앙리의 어깨 위로 기댄 머리를 고쳐 잡았다. 앙리는 빅터의 등 뒤로 뻗어 차창에 닿은 손을 거두지도 못하고, 혹여나 빅터가 다시 깰까봐 불편하게 얼어버린 몸을 고치지도 못했다. 물색없이 놀란 가슴부터 진정시켜야 할 텐데 쉽지 않아, 그대신 앙리는 다시 빅터에게 해야 할 말을 고르고 곱씹어 보았다. 덜컹, 덜컹. 오해일세. ……무슨 오해? 혼자서 속으로 읊어낸 변명조차 길게 가지 못했다. 심장 소리가 들리면 안 될 텐데. 기차가 달리는 소리, 길게 꼬리를 그리는 증기소리, 차창을 두드리는 빗소리……. 귓가에 들리던 소리들이 아득히 멀어져만 갔다. 꼭 빅터의 숨소리와 요동치는 심장 소리가 세상의 전부인 듯하여 앙리는 두 눈을 끔뻑거리며 마른세수를 했다. 그렇게 머릿속에 어지럽게 떠다니는 생각들을 닦아내고 나니 저를 향한 의문이 하나 남아, 언제까지 남았는지 모를 긴 시간동안 앙리를 다시 잠들지 못하게 만들었다.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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