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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ankenstein

[빅터앙리] sincerely yours



“저……. 도련님.”


조심스러운 목소리에 빅터는 낮은 한숨과 함께 손에 든 책 몇 권을 책상 위로 가볍게 두드려 정리했다. 탁, 탁, 탁. 소리 세 번과 함께 고개를 들어 룽게를 쳐다보았다. 빅터는 룽게가 자신을 부른 용건을 이미 다 알고 있다는 눈치였다. 하지만 기껏 찾아온 것에 대한 배려인 것인지 굳이 이 타이밍에 찾아온 것에 대한 질책인 것인지 빅터는 다소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뭔가?”


문 앞에 서있던 룽게가 앙리를 지나쳐 빅터의 책상으로 걸어가 편지 하나를 올리고서 빅터를 향해 슬그머니 내밀었다. 스윽. 섬약한 마찰음에 앙리의 시선이 룽게의 손끝을 따라가 편지에 머물더니 이내 빅터의 손끝으로 향했다. 책을 세워 잡고 있던 손이 책을 눕히더니 이내 편지를 들어올렸다. 굳이 허락이 필요한 관찰이 아님에도 들킬 세라 앙리는 조심스레 시선을 들어 올렸다. 미간이 약간 찌푸려 들었지만 그 뿐이었다. 빅터는 들어 올린 편지를 가볍게 흔들었고, 한 박자 느리게 룽게를 응시했다. 눈썹이 가볍게 들썩였다. 한쪽 입꼬리를 살짝 끌어당기며 대답을 구하자 앙리도 룽게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앙리는 빅터가 인내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그 편지가 싫다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돌아갈 채비 밖에 없는 무력한 자신에 대해서 말이다. 룽게가 대답했다.


“줄리아 아가씨의 편지입니다.”


룽게는 편지가 다행히도 제 1사단 무기연구소에서의 마지막 밤을 놓치지 않고 잘 찾아와 주었다는 말은 아꼈다. 




어머니에 대한 기억은 많지 않았다. 워낙 유년이었기 때문인지 저도 모르는 사이 지워버린 것인지는 모르나, 어찌됐든 어중간하게 남은 그녀에 대한 기억은 썩 포근하지 않았다. 이제 얼굴도 흐릿한 그녀의 인상에 대한 기억이라면 동화 속 마녀 같았다는 것이다. 대부분 술에 절어 있었던 탓에 콧잔등은 언제나 발갛게 물들어 있었고 푸석푸석한 곱슬머리는 정리되지 않은 채 흐트러져 있었고 입술은 곧 죽을 사람처럼 말라붙어 거스러미가 일어나 있었다.


그녀는 이따금 마른 나뭇가지 같은 손으로 앙리의 뺨을 바투 잡고 말하곤 했다. 지 애비랑 똑 닮은 새끼. 그녀는 화를 겨우 삭이듯 한 음절 한 음절 한을 짓씹어 말했다. 앙리의 세계에 타인이란 엄마 뿐이었고, 앙리에겐 그녀처럼 원망할 남자가 없었다. 두 눈에 아버지를 담아본 적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어린 앙리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그저 가만히 얼어붙어 그녀가 흔드는 대로 흔들리며 뺨에 닿는 술 냄새와


‘넌 평생 누굴 사랑할 수 없을 거야. 그럴 자격 없이 태어났으니까.’


저주를 고스란히 받아내는 것 밖엔 없었다.


그녀와의 마지막은 동화 속 마녀들의 최후처럼 극적이지는 않았다. 겨우 눈을 감고 잠들었던 어느 밤, 갈증이 앙리의 눈꺼풀을 두드렸다. 잠결 그득한 손으로 문고리를 잡아 돌렸다. 하지만 당겨야 열리는 문이 쉬이 열리지 않았다. 문고리를 잡은 손에 다시 한 번 힘을 주어 보았지만 철컥하는 소리만 들릴 뿐 꿈쩍도 않았다. 쾅쾅쾅. 문을 두드려 보아도 돌아오는 것은 정적뿐이었다. 새까만 어둠이 악몽처럼 앙리의 숨을 짓눌렀다. 잠이 확 달아나는 느낌이었다. 분명 제 집 임에도 불구하고 갇혔다는 생각이 들자 뒷머리에 식은땀이 흘렀다. 다른 손까지 문고리로 올리고서 바닥을 디딘 발에 힘을 주어 있는 힘껏 당겼다. 이를 악물고 드러눕듯이 문을 잡아당기자 겨우 끼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틈이 벌어졌다. 


살고자 함이었는지 그것이 저를 죽일 수도 있다는 호기심인 줄을 몰랐던 것인지. 앙리는 색색거리는 숨을 겨우 참으며 벌어진 문틈 사이로 고개를 빠끔 내밀었다. 팽팽한 줄이 있었다. 앉은 듯 누운 듯 비스듬히 붕 떠 있는 상체 아래로 늪에서 누가 잡아당기기라도 하듯 하체가 주욱 늘어져 있었다. 축 처진 채로 바닥에 겨우 닿은 손목은 천장을 향해 꺾여 있었다. 앙리의 뺨을 패이도록 잡았던 마른 손가락엔 미동이 없었다. 앙리는 까무룩 기절했다.


살아있었기 때문에 앙리는 눈을 떴다. 다만 그의 집은 아니었다. 왕래가 거의 없어 어떻게 생겼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이모의 집이었다. 부부는 그의 어머니가 어떻게 되었는지, 앙리가 얼마 만에 의식을 차리게 되었는지 아무것도 말해 주지 않았다. 앙리가 어머니의 소식을 알게 된 것은 벽 너머로 부부 싸움하는 소리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어미는 앙리의 방문에 목매달아 죽었다고 했다. 


‘가여운 내 조카.’ 갸륵한 목소리에 앙리는 되묻고 싶었다. 제가요? 내외는 앙리를 사랑하는 척 말했으나 어쨌든 적어도 남은 방이 없는 것은 사실이었다. 습하고 좁은 벽장에서 성의 없는 식사를 받아먹으며 새우잠을 지새운 지가 채 며칠, 눈을 뜨니 그의 새로운 집은 고아원이 되어있었다. ‘인사하렴.’고아원 원장은 저와 비슷한 처지의 아이들 앞으로 이끌었던 손을 놓으며 말했다. 앙리는 금세 허전해진 손목을 멀거니 내려다보았다. 앙리의 손목엔 벌건 손자국이 남아있지 않았다. 그렇다고 하여 원장의 손이 따스하지도 않았다. 앙리는 이곳에서도 오래 있지 못할 것임을 이내 깨달았다. 고아원은 풍족하지 못했다. 기본적인 잠자리도 먹을거리도 형편없었고 고아원생들의 정서는 물질에 비례했다. 앙리는 잘 적응하지 못했다. 이방인처럼 겉도는 날이 길었다. 몇 시간 전만 해도 앙리를 벽에 밀치고 그의 발 밑으로 침을 뱉던 녀석과 등을 맞대어 누워 잠들어야 했다. 콤콤한 냄새가 나는 이불을 어깨까지 덮으며 눈을 감았다. 눈을 뜨면 이번에는 또 어느 낯선 곳이겠지.


“아.”


눈을 떴다. 몸을 일으키자 가슴까지 덮였던 담요가 허리춤으로 내려갔다. 앙리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젠 떠날 채비가 거의 끝난 1사단 무기연구소 내 빅터의 집무실이었다. 언제 벌써 시간이 이렇게 흘렀나. 앙리는 잠결에 헛헛하게 웃었다. 오랜 시간이 지났다고 하기에는 잠든 지 겨우 세 시간밖에 흐르지 않은 까만 새벽이었다.


대단하지 않은 악몽이었다. 꿈은 잘 꾸는 편이 아니었다. 가끔 과거의 단편들이 조각조각 흐릿하게 그를 찾아오곤 했다. 까맣게 잊고 있었다는 것조차 잊고 있을 때에 잊지 말고 기억하라는 것처럼 어미의 저주는 그런 식으로 앙리를 찾아왔다. 꿈을 꾸고 일어난 날에는 으레 그러하듯 손으로 마른 뺨을 가볍게 쓸었다. 아주 오래전에 손가락 다섯 개가 눌렀던 자리가 아린 것 같았기 때문이다. 


시선을 비스듬히 내렸다. 눈이 조금씩 어둠에 익어가자 사물들이 찬찬히 눈에 들어왔다. 테이블 위로는 다 비우지 못한 잔과 술병 몇 개 그리고 안줏거리였던 부스러기 정도가 널브러져 있었고, 그 너머 소파에는 빅터가 긴 다리를 접은 채 모로 누워 잠들어있었다.‘대위님’이라고 불렀던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술기운에 몸을 구겨 잠이 들었다는 것이 귀엽기도 하고 우습기도 하여 앙리는 조금 웃었다. 그러다 제 몸에 덮여있던 담요가 빅터의 것이었다는 것을 깨닫곤 아, 하고 멍청한 소리를 냈다. 스스로 덮은 기억이 없다. 빅터가 덮어 준 것을 보아하니 먼저 곯아떨어진 것은 앙리 쪽인 모양이었다. 흐음. 빅터가 낮게 숨을 고르는 소리를 냈다. 몸을 더 동그랗게 말고는 팔짱 낀 손으로 팔을 문질렀다. 한기가 드는 모양이었다. 앙리는 담요를 손에 들고 조용히 일어나 발걸음을 죽여 빅터의 앞으로 다가갔다.


잠결에도 추운 것인지 혹은 좋지 않은 꿈을 꾸는 것인지 미간이 찌푸려 있었다. 돌아갈 곳이 있는 사람이 지을 만한 표정은 아니었다. 문득 앙리는 오후에 도착한 줄리아의 편지를 떠올렸다. 제네바에는 그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


하루가 멀다시피 1사단 무기 연구소에는 편지가 도착했다. 처음부터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연구소에 도착한 후 앙리는 빅터가 편지를 읽는 것도 그렇다고 하여 반기는 것도 본 적 없었다. 앙리는 가끔 그런 착각을 한 적도 있었다, 구태여 피하려 드는 이유는 뭘까. 학문에 대한 탐구를 제외한다면 천성에 있어본 적 없던 호기심이 생겨 빅터가 없는 자리에서 슬쩍 던지듯 룽게에게 물은 적이 있다. 누가 보낸 편지입니까? 룽게는 대답했다. 줄리아 아가씨라고 도련님의 약혼녀 되는 분이네. 아아.


‘그런데 왜 한 번 열어보지도 않으시고…….’


혼잣말을 한다는 것이 크게 나온 모양이었다. 룽게는 심기가 불편한 것인지 듣지 못한 것처럼 흘려 보내려는 것인지 작게 헛기침을 했다. 멍하니 읊조리던 앙리는 그 기색에 저가 주제넘은 질문을 했다는 것을 깨달았으나 룽게는 낮게 한숨을 내뱉 듯 대답했다. 어쩌면 그렇게 믿고 싶은 혼잣말처럼,


‘그리움이 그렇지. 눈에 새기면 흘러 넘치니까 그런 것 아니겠나. 저래 봬도 우리 도련님, 아직 겁이 많으시거든.’


그리움을 가져 본 일이 없었다. 그래서 앙리는 편지를 받아 든 빅터를 곱씹어 보았다. 발신인의 이름을 들었을 때의 표정, 편지를 받아 든 후 멀거니 찾아오는 침묵, 이내 이미 편지가 수북이 쌓인 책상서랍에 넣어두고 서랍을 밀어 닫는 그 손끝까지. 하나하나 따라 가고 있을 때 빅터의 목소리가 그를 불렀다. 


“뒤프레 소위.”


“네, 대위님.”


대답이 반사적으로 튀어나왔다. 아직 깊은 잠결에 젖어있는 눈동자와 마주쳤다. 숨을 참지 않으면 딸꾹질이라도 날 것 같아 숨을 꿀꺽 삼켰다. 빅터의 얼굴 앞에 무릎을 접어 앉아 그에게 덮어주기 위해 들었던 담요를 멍청하게 든 채로 두 눈만 끔뻑이고 있었더니, 그 꼴이 제법 멍청해 보였는지 빅터가 흩어지는 웃음을 흘렸다. 베개 삼은 제 팔에 기댄 머리를 고쳐 누이며 잔뜩 잠겨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건 거리가 너무 멀어.”


명령조는 아니었으나 앙리는 그것이 빅터 프랑켄슈타인 대위가 앙리 뒤프레 소위에게 내리는 마지막 명령이라는 것을 알았다.


앙리에겐 어떠한 단어로 이루어진 관계는 있었다. 하지만 그에겐 숨이 튼 그 순간부터 부모가 없었던 것처럼 관계는 유대가 결여된 단어로만 존재할 뿐이었다. 혼자인 것이 불편하긴 했지만 불만은 없었다. 다만 그것이 얼마나 간절했던 것인가를 깨달은 것은 한 순간이었다.‘부탁이야, 친구.’ 빅터가 앙리를 처음으로 친구라 일렀던 밤, 단단하게 어깨를 붙잡았던 손과 다정했던 목소리와 제 눈동자를 찾아내듯이 맞추어 오는 눈빛을 잊지 못해 앙리는 그날 새벽 내도록 잠을 설쳤다. 


친구라는 것은 앙리가 앞으로도 살아 숨 쉬는 동안 가질 수 있는 가장 친밀한 관계의 이름이며 빅터가 그의 유일한 유대임을 앙리는 알았다. 기적이란 단 한 번 뿐이라 가치가 있는 것이기에. 앙리에게 있어 빅터는 친구 이상의 기적이었다. 다만 빅터에게 있어 앙리는 그런 존재가 되지 못할 것이었다. 그가 가진 빅터의 시간을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었다.


앙리는 담요를 그의 어깨까지 덮어주곤 두어 번 가볍게 토닥여 주었다. 쉽게 거두어지지 않는 손을 그대로 두고선 대답했다.


“그래. 빅터.”


빅터는 눈을 감은 채 흡족한 듯 웃으며 앙리의 손 위로 제 손을 덮었다. 작게 힘을 주어 붙잡는 손아귀에 도련님은 아직 겁이 많다던 룽게의 말이 떠올랐다. 손등 위로 닿는 체온은 따스했고 낮게 흩어지는 숨결에는 긴장감이 없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찌푸려 있었던 빅터의 미간이 나른하게 풀려 있었다. 종전 선언 이후 처음으로 아니 어쩌면 그를 만난 이후 처음으로 보는 안온한 얼굴이었다.


“훨씬, 듣기 좋아.”


이내 다시 잠들 것처럼 목소리의 끝이 희미해졌다. 그래. 앙리는 감은 눈꺼풀에 아래 드리워진 속눈썹의 그림자를 하나하나 세기라도 하듯 빅터를 멀거니 내려다보았다. 그는 주제를 알았다. 무얼 더 바랄 수 있겠는가.




빅터에겐 돌아갈 곳이 있다. 그렇다고 생각했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곳에 빅터를 기다리는 사람은 있었으나, 그곳이 빅터의 안식처가 될 수 있다는 뜻은 아니었다. 제네바에서 돌아오는 기차에서부터 그는 눈 한 번 제대로 붙이지 못하고, 초조한 사람처럼 손을 쥐락펴락했다. 물어보지 않은 질문의 해답인 양, 기차에서 내려 제네바 땅을 밟은 지 몇 분이 되지도 않아서 돌 하나가 날아왔다. 뒤이어 매서운 목소리가 꽂혔다. 마녀의 자식이 돌아왔어! 


빅터를 위해 준비하였다는 연회장에서도 다르지는 않았다. 빅터는 불쾌한 기색을 숨기지 못한 채 좀체 따라가 힘든 속도로 연회장을 가로질러 걸었고, 그 뒤를 애써 점잖은 걸음으로 바삐 따라가던 앙리의 귀에 귀족들의 수군거림이 닿았다. 훈장까지 달고 왔다니, 전쟁터가 어지간히 좋았나봐요? 마녀의 자식이 영웅이 되려면 그 수밖에요, 세상에 빅터가 제네바의 영웅이라니! 낮은 힐난을 등으로 받아낸 걸음의 종착에는 그의 숙부가 있었다. 빅터는 피로 가득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고 그의 숙부는 역정을 토했다. 넌 달라지지 않아! 그리움이 재회로 맞닿은 기차역에서부터 화려한 조명과 색색의 드레스가 음악에 맞추어 춤추는 연회장에서까지, 그 무수한 사람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빅터는 혼자였다. 


아. 어쩐지 가슴 한 구석이 찡했다. 감각에 적당한 말을 찾아내지 못한 채 빅터를 따라 성으로 발걸음을 향하는 순간 눈에 걸리는 아가씨가 있었다. 드레스 앞자락을 두 손으로 움켜쥔 채 언제 떨구어도 이상하지 않을 눈물을 두 눈에 그렁그렁 담고 있었다. 아랫입술을 꾹 짓씹은 채 빅터가 떠난 자리를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쳐다보고 있었다. 원망이라고 하기엔 애틋한 얼굴로. 인사 한 번 나누지 않았는데도 알 수 있었다. 저 사람이 줄리아 아가씨구나. 빅터를 따라 서둘러 나서는 데도 그 얼굴에서 눈을 쉬이 뗄 수 없었다. 심지어 프랑켄슈타인 성으로 가는 내내 눈물을 참아내는 그 표정이 잊어지지 않았다. 




전쟁터에 있을 때가 더 편안해 보였다고 한다면 앙리 또한 다른 제네바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빅터를 마녀의 자식이라 손가락질 하는 꼴일까. 하지만 빅터는 집으로 돌아온 사람 같지 않았다. 갇혀버린 사람 같았다. 아주 드물게 외출하는 경우가 있기는 하였으나 빅터는 필요한 경우가 아니라면 성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앙리는 농으로 그런 말을 건넨 적이 있다. 


빛이라도 쬐면 죽는 병이라도 걸렸어?


사체의 봉합을 끝낸 후 장갑을 벗는 앙리에게 바람 빠지는 웃음 뒤로 덤덤한 목소리가 돌아왔다. 


있다면 자네가 고쳐줄 텐가?


고개를 들어 올렸더니 앙리를 보고 있었다. 아. 표정이. 멋대로 무엇인가 기대하게 만들어버리는 대답이었다.


물론 너무 실험에만 몰두하지 말고 기분 전환 삼아 밖에도 좀 나가보라는 완곡한 권유였고 빅터의 대답은 거절임을 알았으나 앙리는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적의를 숨기지 않았던 제네바 사람들의 눈빛이 떠오른 탓이다. 그래도 줄리아 아가씨의 편지는 읽어 보아도, 이젠 그리움도 손에 닿을 수 있는 거리에 있으니 찾아가보아도 좋지 않냐는 말도 할 수 없었다. 주제 넘는 발언은 삼켜야 유지 될 수 있는 관계임을 아는 까닭이다. 굳이 그 뿐이냐 하면 다른 이유도 있는 것 같았지만 앙리는 여전히 그 희미함을 어떠한 단어나 문장으로 만들어내지는 못했다. 무의미한 호기심이라 여기는 것이 좋을 터였다. 그저 전쟁터에 있었을 때처럼 매일같이 도착하고, 봉투 한번 열리지 않은 채 서랍 속에 쌓여가는 편지처럼. 덮어낼 수밖에. 


그렇게 알 수 없는 무언가를 켜켜이 덮어내던 어느 날에 엘렌으로부터 빅터의 유령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날 앙리는 성인이 된 이후 처음으로, 아니 고아원으로 가게 된 이후 처음으로, 아니 이모에 집에 맡겨진 이후 처음으로……. 마지막으로 울었던 게 언제더라. 어미의 죽음을 보았을 때에는 울지도 못한 채 기절했고 실감할 겨를도 없이 버려지고 버려졌다. 그러니 앙리는 그가 기억하기로는 삶에 있어 최초의 기억 이후로부터 처음 울었다. 프랑켄슈타인 성으로 돌아와 그곳에 마련된 자신의 방에서 혹여 밖에 들릴 세라 이불을 머리 꼭대기까지 뒤집어쓰고서, 빅터의 과거가 제 설움이라도 되는 양 숨죽여 펑펑 울었다. 그렇게 눈물을 뚝뚝 떨구어내는 동안 자신의 세계가 더욱 작아지는 것도 모르고.


전쟁터에서와 달리 빅터는 종종 술을 마셨다. 술기운이라도 빌리지 않으면 잠이 오지 않는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렇다고 하여 빅터가 술이 센 것은 또 아니었다. 종종 빅터가 아침 식사 자리에 수척해진 얼굴로 앉으면 룽게는 한탄 섞인 목소리로 잔소리를 했다. 아니, 도련님은 평소에 드시는 것도 별로 없으면서 무슨 술을 그렇게 드세요! 몇 잔 드시지도 못 할 양반이 욕심만 많아서! 그러면 빅터는 골이 울리는지 두 손으로 관자놀이를 짚고는 차마 반박할 기운도 없는 사람처럼 고개만 수그리고 있었다. 그 모양새가 제법 아, 평범한 가정의 부모 자식이라면 이런 모습일까 싶어 앙리가 키들거리며 웃으면 빅터가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왜 웃어? 아, 아니. 정말로 빛이라도 쬐면 죽는 병에 걸린 사람 같아서. 들으셨죠, 도련님? 


그날 밤 하늘엔 조만간 비가 오려는 모양인지 하늘에는 달무리가 져있었다. 제법 서느런 기운에 몸이 떨려 창문을 내려 닫으니 등 뒤에서 똑똑, 노크소리가 들렸다. 늦은 밤시간에 룽게가 들를 일은 없었고, 뒤를 돌아보기도 전에 문이 열렸다. 굳이 허락을 구하지 않아도 언제든지 반길 사람이 술잔 두 개와 술 한 병을 든 채로 방에 들어온 뒤 문을 닫았다. 


“이 밤에는 무슨 일로?”


다 알고 있다는 듯이 테이블을 당겨 자리를 마련하니 당연하다는 듯 의자를 끌어와 자리에 앉으며 빅터가 대답했다. 


“잠을 설치고 있는 것 같아서 말이야.”


“내가?”


“내가.”


그렇게 별 다른 안주도 없이, 별 다른 이야깃거리도 없이 한 잔 두 잔 기울이다, 술병 주둥이에서 떨어지는 남은 술이라곤 겨우 몇 방울이 전부였을 때에. 빅터가 마른 손으로 얼굴을 쓸어 내리고는 말했다. 


“이런. 아쉽지만 이제 자리에 누워야겠어.”


빅터 프랑켄슈타인 대위의 명령은 종전과 함께 끝이 났다. 취할 만큼 마시지도 않았는데. 조금 얼떨떨한 두 눈을 끔뻑이자 겨우 잠이나 재울 수 있을 만큼의 어설픈 취기가 어린 눈이 저를 빤히 보고 있었다. 명령조의 눈빛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하여 허락을 구하고 있는 눈빛도 아니었다. 친구 빅터 프랑켄슈타인은 이런 식으로, 이런 건 반칙이라고 핀잔을 주고 싶을 만큼 불가항력이었다.


넓다니까. 침대 위로 안 올라오냐는 말에도 앙리는 고집스레 바닥에 요와 이불을 깔았다. 그 언젠가 어린 날에 고아원생들과 좁은 침대에서 몸을 부대끼고 잔 날도 있었는데, 훨씬 더 넓은 성의 침대에서 자리를 나누어 자는 게 뭐 별 대수려고 하는 생각을 하긴 했었다. 하지만 고집 부리길 잘 한 것 같았다. 침대의 끄트머리에 포갠 손등 위로 턱을 괴고 저를 내려다보며 도란도란 말을 꺼내는 조금 천진한 얼굴을 볼 수 있었으니까. 빅터. 응. 나 취한 걸까? ……응? 얼마 마시지도 않았는데 주책 맞게 뛰는 심장 소리를 들키지 않을 수 있었으니까. 


뭐가 잘못 된 것인지. 심장이 뛰는 것은 저가 어떻게 통제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까만 천장만 바라보며 두 눈을 깜빡깜빡, 포갠 두 손으로 왼쪽 가슴 언저리를 꾸욱 눌렀다. 당연히 헛수고였다. 맥박이 손끝에 닿자 귓전이 박동 소리로 터질 것 같았다. 


“빅터. 자?”


대답 대신 고른 숨소리가 낮게 울렸다. 앙리는 살그마니 몸을 일으켜 침대 위를 보았다. 언제 잠든 것인지 빅터가 침대 끄트머리에서 바닥을 향해 모로 누워 잠들어 있었다. 허리춤에 머문 이불을 어깨까지 끌어올려주었다. 1사단 무기연구소에서와는 또 다른 고단함이 그의 얼굴에 그늘져 있었다. 자꾸 가슴이 뛰었다. 정말로 취했나보다. 문득 앙리는 무엇인가 고백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친구야. 나 혼자만 네 이야기를 알고 있는 건 치사하고 비겁하니까. 앙리는 세운 무릎을 안고서 나지막이 이야기를 읊었다. 


“나도 엄마라는 사람이 있었어. 어떻게 생겼더라, 내가 기억하는 그 사람은…….”


좋은 자장가가 될 수 없는 이야기였다. 감히 이해라는 표현을 쓰기에 빅터의 유령이 안은 상처는 너무 컸고, 어설픈 공감대를 우겨 같은 처지가 혼자가 아니라는 위로를 받고 싶은 것도 아니었다. 그냥 어릴 적에 저가 받아야 했던 저주 같은 것을 그리고 정말로 저주가 통했는지 아주 오래도록 혼자였던 날들을 꺼내놓고 싶었다. 혹시나 말이야 빅터. 분수를 알기 때문에 그가 잠이 들었을 때에 술기운을 빌려서나 겨우 토해낼 수 있는 말들이었다. 내 이야기가 너에게 닿아서 적어도 이 성 안에서 만큼은 세상에 너 혼자라는 외로움을 덜어낼 수 있다면. 그것이 주제넘은 기만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은 며칠 지나지 않아서였다.




예고도 없이 실험실 문이 벌컥 열렸다. 빅터의 시선이 실험실 문을 향했다. 앙리는 빅터의 시선을 따라가기 전에 당연한 수순처럼 빅터의 표정부터 살폈다. 불쾌함이 꼭 적의처럼 드러나 있었다. 하고 있는 실험도 실험이겠거니와 최근 초조함에 성말라가고 있던 차였다. 애초부터 실험의 방해를 가장 싫어하던 빅터였고 그걸 룽게가 모르진 않을 텐데. 어지간히 숨이 찬지 밭은 숨소리 위로 가슴을 탕탕 내려치는 소리가 나 앙리 역시 룽게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줄리아 아가씨께서 오셨습니다.”


줄리아? 연인의 갑작스런 방문이 반가운 목소리는 아니었다.


먼저 응접실로 도착한 것은 앙리였다. 룽게는 달리 바쁘게 준비 할 것이 있다고 앙리에게 따뜻한 차를 서둘러 부탁했고 빅터는 방으로 올라갔다. 저야 어떤 꼴이든 상관없지만, 지금 약혼녀를 맞이할 만한 상태는 아닌 것 같다고 앙리가 권한 까닭이다. 뭐? 빅터의 예민함에 앙리는 변명했다. 그러니까 부취腐臭가……. 마침 새로 접합한 부위에 전기 자극을 주기 전 약물을 주사하여 반응을 기다리던 찰나였다. 빅터는 기다림의 시간 동안 지난 기록의 실패사례를 뜯어보고 오늘의 일지를 기록하며 입술을 씹어댔다. 그녀를 탓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나, 기다림이 시간이 허사가 되어버렸으니 빅터에게는 초조함을 달랠 시간이 필요했다. 반복된 실패가 그녀의 탓도 아닌데 그녀에게 애꿎은 감정의 화살을 쏘아서는 안 될 일 아닌가. 최근의 빅터는 충분히 그런 실수를 할만 했고, 곧이곧대로 말했다간 자존심이 고집을 부릴 것이 뻔했다. 한동안 대답 없던 빅터는 그의 의중을 알아 챘는지 순순히 앙리의 말을 따랐고, 먼저 응접실 문 앞에 선 앙리는 그제야 제 꼴이 신경 쓰여 소매로 뺨을 부벼 닦았다. 코가 이미 절어있는 탓인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당장 느끼기에 별 다른 약품 냄새나 시체 냄새는 나지 않는 것 같았다. 큼큼, 괜스레 헛기침으로 인기척을 내고선 난로 앞 소파에 앉은 줄리아에게 걸어갔다. 


그리고, 제 나름 배려의 행동이 주제넘을 수도 있었다는 것을 줄리아를 보고서야 알았다. 룽게가 그렇게 호들갑을 떨며 실험실에 들이닥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줄리아는 말 그대로 흠뻑 젖어있었다. 룽게가 덮어준 듯한 담요를 꼭 여민 채, 난로의 불을 쬐면서도 한기가 쉬이 가지 않는지 눈을 질끈 감고 호들호들 떨고 있었다. 실험실에만 박혀있느라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 앙리는 창문을 바라보았다. 오전에만 해도 그럴 기미가 없었던 하늘이 시꺼멓게 젖은 채 성난 비를 쏟아내고 있었다.


“아. 아가씨.”


인사는 탄식에 가까웠다. 앙리의 목소리에 줄리아가 고개를 들었다. 시선이 마주했다. 눈에 어린 기대가 순식간에 실망으로 변했다. 그녀는 파리하게 떨리는 입술로 말했다.


“빅터가…… 먼저 와줄 줄 알았어요.”


“아. 빅터가……그…….”


형성되지 못한 채 겉도는 문장을 발화하는 대신 앙리는 그녀에게 룽게에게서 부탁받은 차를 건네었다. 


“이것 좀 드세요.”


“고마워요, 앙리. 따뜻하네요.”


줄리아는 앙리가 건넨 찻잔을 두 손으로 받아들고 온기를 음미하듯 잔 위로 코를 가져다 댔다. 그녀와 인사를 나눈 적은 있었지만 그 뿐이었다. 난로에서 타닥타닥 장작이 타오르는 약간의 소음마저 간절할 정도로 앙리는 지금 이 상황이 어색하였으나 그렇다고 하여 혼자 두고 떠날 수도 없었다. 근처에 자리 잡아 앉았다. 무슨 말이라도 꺼내야 할 것 같은데 적당한 말을 찾기 쉽지 않아 깍지 낀 채 꼬물거리던 손만 내려다보다 시선을 돌렸다. 비싼 천이었을 것이 분명한 치맛자락이 흙탕물에 젖어 물들어 있었다. 아. 소리 없이 탄식을 내뱉곤 고개를 들었다. 벽난로의 따뜻한 불빛이 줄리아의 얼굴 위로 어른거렸다. 조금씩 온기를 찾아가고 있는지 바짝 굳어있던 표정이 조금 느슨하게 풀어져 있었다. 말이 멋대로 튀어나왔다.


“길이 험해서 쉽지 않으셨을 텐데 어떻게……. 미리 언질 주셨으면 모시러 갔을 텐데요.”


“아니에요. 몰래 나오지 않았더라면 올 수 없었을 거예요. 갑자기 비가 쏟아질 거라곤 생각도 못했지만.”


두 손에 쥔 찻잔을 입으로 올리던 줄리아가 별안간 푸스스 웃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조금 들뜬 목소리였다.


“하지만 나쁘지 않네요. 살면서 이런 일탈은 처음이거든요. 하지만 어쩔 수 없잖아요?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빅터는 날 만나 주지 않을 테니까.”


목소리에 원망은 없었으나 앙리는 꼭 제 탓인 것 같아 마른 입술을 가볍게 말아 씹었다. 제네바로 온 이후 이 성이 그들 세계의 전부인 것처럼 실험에 빠져 산 것은 저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꼭 부추기는 마냥, 더 큰 세상을 꿈꾸고 있으면서도 세상에 둘밖에 없는 것처럼. 제네바는 빅터로부터 등을 돌렸으나 엘렌과 줄리아만큼은 계속 문을 두드렸다. 너를 기다리던 사람이 여기 있다고. 앙리는 제네바에서도 매일같이 룽게의 손을 통해 전달되던 줄리아의 편지를 기억했다. 그리고 집중을 이유로 그 편지 역시 열어보지 않던 빅터의 야속함도 기억했다. 그런 빅터에게 룽게는 본인이 더 속상한 듯 매번 할 말이 많은 눈치였지만 숨기지 못하는 한숨으로 참을 뿐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줄리아는,


“빅터는 잘 모르나 봐요. 내가 얼마나 좋아하는지. 난 그 이유로 이렇게 무작정 쳐들어 올 수도 있는 사람인데.”


저런 표정으로 웃으면서 말할 수 있는 걸까. 속상한 투에도 그녀는 옅게 웃고 있었다. 빗물이 마른 얼굴이 난로의 불 때문인지 발그레하게 물들어 있었다. 그녀는 기다림의 시간이 조금 초조한지 손가락으로 찻잔을 가볍게 두드렸다. 매섭게 창문을 두드리는 빗물에 흠뻑 젖어 떨고 있는 데도 전혀 초라해 보이지 않았다. 앙리는 다시 발끝을 내려다보았다. 흙탕물이 번진 그녀의 치맛자락과 달리 단정하게 말라 있었다. 어쩐지 선득한 기분이 들어 어깨를 움츠렸다. 난로의 볕이 그녀만을 향하는 것 같았다. 이것을 무어라 부르면 좋을까.


“줄리아!”


멀지 않은 기다림의 끝에 줄리아를 부르는 빅터의 목소리가 들렸다. 저 멀리서 걸어오는 발자국 소리에 귀 기울이던 사람처럼 고개를 돌린 줄리아는 “빅터. 왔어?” 이내 그의 이름을 부르며 눈을 휘어 웃었다. 줄리아의 모습을 보고 놀란 것은 빅터도 마찬가지인지, 금세 정리한 행색이 무색하게 달려가듯 줄리아의 앞으로 다가갔다. 앙리는 얼결에 소파에서 일어나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줄리아의 앞에 한 무릎을 꿇어앉은 빅터는 줄리아 손의 찻잔을 들어 테이블로 내리고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걱정스레 올려다보는 시선과는 달리 빅터의 말은 조금 모가 나있었다. 


“대체 어쩔 작정으로 갑자기 온 거야?”


다정한 손길이 그녀의 젖은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고는 이내 그녀의 뺨을 쓸어주었다. 줄리아가 말했다. 


“순서를 지켜 말해야지. 나한텐 보고 싶었어가 먼저야.”


줄리아는 뺨을 어루만지는 빅터의 손위로 제 손을 포개어 기대듯 눈을 감았다. 어느 따사로운 오후, 볕에 잘 마른 침구의 포근함에 파묻혀 잠을 청하듯이. 밖에서 거세게 창문을 두드리는 빗소리가 무색했다. 그리고 그제야 앙리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저런 얼굴을 하는구나. 


그래. 보고 싶었어.


빅터의 목소리가 전에 없이 다정했다. 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다.


있어서는 안 될 자리에 있는 것 같아 앙리는 한 걸음 더 뒤로 물러나면서 문득 깨닫게 된다. 저의 애틋함이 오만한 착각에서 비롯한 것임을. 빅터의 세계는 자신과 같지 않았다. 그에게는 홀로 어두운 밤 안에 갇혀 있어도 문을 열고 들어와 다정함으로 곁을 지켜줄 사람들이 있었다. 앙리의 삶은 빅터 하나만으로 충분히 보상 받을 수 있었지만, 빅터에게는 그가 그리워 할 이름이 앙리 말고도 있었다. 같은 저주를 받았지만 공유할 수 없는 외로움이었다.


단 몇 걸음 물러났을 뿐인데, 눈앞에 빅터와 줄리아가 있는데도 성 안에 혼자만 남았다. 혼자인 것은 앙리 뿐이었다.




그날 이후 빅터는 한동안 매일 외출했다. 괜찮은 척 하였으나 괜찮지 않았던 탓인지 줄리아가 크게 앓았기 때문이었다. 룽게에게 전해들은 바에 의하면 그의 숙부는 진노하여 빅터를 문전박대 하였다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빅터가 슈테판 시장의 저택에 찾아간 것은 그는 줄리아의 약혼자였으며, 줄리아의 열병이 결국 저에게서 비롯하였다는 책임 때문이었다. 빅터는 오후의 해가 하늘 꼭대기로 향할 즈음 성에서 출발하여, 저택의 문 앞에서 하루 종일 허락을 기다리다, 해가 잠기고 저녁달이 뜨면 저택에 들어서지 못한 발걸음을 돌려 성으로 돌아오곤 했다. 꼬박꼬박 성으로 돌아오다 나흘째 되던 날에는 외박을 했다. 그의 숙부가 결국 빅터를 저택 안으로 들였기 때문이었다. 예고도 없이 빅터도, 룽게도 돌아오지 않던 그날 밤에 홀로 성에 남은 앙리는 혼자인 실험실이 낯설어 방으로 올라왔다. 좀체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눈을 질끈 감았는데도 비가 세차게 내리던 그날 밤 다정했던 두 사람의 모습이 눈앞에 자꾸 아른거렸던 탓이다.


외박은 단 하루로 끝났다. 그 이후로도 빅터는 줄리아의 간호를 위해 슈테판 시장의 저택에 다녀왔다. 열흘 가량의 시간이었다. 그 시간 동안 빅터는 성 밖으로 날려버린 시간을 쫓아가듯 밤을 새며 실험에 몰두했고, 잠을 제대로 자기는 하는 것인지 겨우 눈을 붙이고 나면 다시 저택으로 떠나서는, 성이 난 것 같은 발걸음을 실험실로 향했다. 이러다 분명 탈 생기지. 결국 실험실 문 앞에서 그를 막아섰다. 성금함을 겨우 삭이고 있는 눈빛이 앙리를 쏘아보고 있었다. 피식자가 된 기분이 들어 뒷골이 서늘했으나 피하지도 못한 채 앙리는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제발 좀 쉬어. 아니, 식사라도 하고,”


“비켜.”


“너 이 상태로는 지금 실험실에 들어가도 제대로 집중도,”


“지금 실험의 실패가 내 탓이라고 말하고 싶은 건가?”


네 선택으로 다정은 그곳에 베풀어 놓고 왜 여기서 화풀이 하냐는 말은 할 수 없었다.


“지금 그런 말이 아니잖아!”


처음으로 높여본 언성에 흠칫한 것은 오히려 앙리였다. 실수했다 싶으면서도 어쩔 수 없었다. 이미 뱉은 소리를 주워 담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집을 부린다면 포기해야지, 언제나 그랬듯이 빅터의 뒤를 따라 들어가 실험실의 문을 닫아야지. 그런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빅터는 한동안 아무런 말이 없었다. 숨이 겨우 닿아 스러질 거리에서 서로 물러설 생각 없는 호흡만이 오갔고, 결국 짧고 긴 침묵의 시간을 먼저 끝낸 것은 빅터였다. 앙리의 어지러운 눈동자를 응시하던 시선이 아래로 떨어졌다.


“……미안하게 됐군.”


뭐……. 무어라 반응을 하기도 전에 빅터는 두어걸음 뒷걸음을 하다 이내 등을 돌려 제 방으로 올라갔다. 비척이며 걸어가는 빅터의 뒷모습에 퍽퍽한 한숨을 내쉬었다. 사과 받을 일이 아니었는데. 힘없이 내리뜬 눈꺼풀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 빅터가 차라리 계속 화를 냈더라면 하지 않을 생각이 머릿속에 뒤엉켰다. 왜 그런 표정을 했을까. 괜히 같이 심란해져 그날 실험실에는 빅터도 앙리도 발걸음 하지 않았다. 


다음 날 성으로 조금 일찍 돌아온 빅터의 왼쪽 뺨이 부어올라 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성이 난 듯 복도를 걸어가며 타이를 풀고, 외투를 바닥에 패대기쳤고, 룽게와 앙리의 부름도 무시한 채 실험실의 문을 잡아뜯듯 열었다. 그리고 실험체의 머리에서 연기가 피어 오르다 전기 자극을 버티지 못하고 터져버렸을 때 빅터의 인내심도 함께 터져버린 모양인지 그는 결국 실험실의 플라스크, 실린더 따위를 집어 던지며 소리를 악 질렀다. 제발! 깨진 유리조각과 시약을 치우는 것은 룽게의 일이었다.


그를 지켜보는 게 힘든 것이 비단 앙리 뿐이었겠는가. 손이 베인 줄도 모르고 마구잡이로 집어 던진 탓에 깨진 유리조각이 눈에 박힌듯 아렸다. 조각조각 주워 모으며 룽게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빅터의 유령을 곁에서 지켜 본 사람이었다. 그 기억이 룽게로 하여금 장의사를 찾아가게 만들었을 것이다.




“앙리 뒤프레. 면회.”


간수의 목소리에 감옥 구석에서 몸을 웅크리고 있던 앙리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쇠창살 건너편에는 아무이 단촐하다 한들 한낮에도 어두침침한 이곳과는 어울리지 않는 드레스를 입고 선 여자가 있었다. 줄리아였다. 누추함이 머쓱하여 앙리는 쭈뼛쭈뼛 일어나 줄리아의 앞으로 가 섰다. 그녀는 비에 젖었던 그날처럼 떨고 있었다. 앙리가 결국 사형선고를 받은 날이었고, 집행은 바로 내일이었다. 곧 죽을 사람은 자신인데도 앙리는 저 여린 어깨가 안쓰러웠다. 이런 곳 까지는 어쩐 일이세요. 목소리가 쉽게 나오지 않아 손으로 쇠창살을 잡았다. 시선을 조금 아래로 내리니 줄리아는 무엇이라도 붙잡을 것이 필요했는지 바들바들 떨리는 제 두 손을 꼭 붙잡고 있었다. 그녀가 숨을 토하듯 겨우 입을 열었다.


“당신을 찾아오는 것 자체가 변명이고 당신에겐 모욕이 아닐까 고민도 했지만…….”


“아가씨.”


“미안해요, 앙리. 나는. …… 나는 내가 무엇인가 할 수 있을 줄 알았어요. 사형은 면하게 할 수 있을 거라고.”


줄리아는 말을 더 잇지 못했다. 단어 사이사이를 잇는 호흡이 불안했다. 두 눈에는 언제 떨구어도 이상하지 않으리만치 눈물이 그득 차올랐으나 줄리아는 어떻게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자기연민에 젖은 얼굴은 아니었다. 감당하지는 못할 죄책감의 무게를 여린 어깨에 이고 언제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모습으로 버티고 서 있었다. 그 모습에 건방지게도 빅터에게선 느껴보지 못했던 동질감이 들었다. 그래서 줄리아가 죄책감에 앙리를 쳐다보지 못하듯이 앙리 역시 줄리아의 눈을 마주할 수 없었을 것이다. 둘은 마주서서는 거울처럼 시선을 떨구고 있었다.


“우리에겐 다른 방법이 없었잖아요.”


감옥의 습한 공기 아래 어색한 침묵을 조심스레 거두어 낸 것은 앙리였다. 앙리의 목소리에 줄리아가 고개를 들었고 앙리는 마른 침을 삼키고선 말을 이었다.


“빅터가 아니었더라면 저는 이미 전쟁터에서 죽었을 사람입니다. 어쩌면 처음부터 이 순간을 위한 운명이었을지도 모르겠어요.”


이런 와중에도 이유를 알 수 없이 웃음이 흘러나왔다. 


“운명같은 거창한 게 아니라 해도, 그날 밤 저에겐 다른 선택의 여지같은 건 없었을 거예요.”


“왜 당신이…….”


창살을 쥔 손끝이 허옇게 세었다. 


“빅터는 유일한 제…….”


친구니까요. 


갑자기 목이 메어 그 말을 차마 꺼내지 못한 채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는데, 거리감이 달랐다. 어떠한 위화감을 감각하기도 전에 줄리아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창살에서 한 발짝 뒤로 물러선 줄리아의 눈가에 맺혀있던 눈물이 결굴 중력을 이기지 못하고 그녀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러자 겨우 하, 하고 뱉은 숨소리 뒤로 참고 있던 흐느낌이 터졌다. 


순간 아차 하는 생각이 들어 앙리는 제 뺨 위로 손을 가져가 얼굴을 더듬었다. 그 어느 날 성문 앞에서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언제 나올 지도 모를 사람을 기약 없는 시간 동안 기다리다 결국 호된 열병에 시달려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빅터의 목소리 한 음절에 해사하게 웃고 있었던 줄리아의 얼굴이 떠올랐던 까닭이다. 앙리는 거울 보는 것을 싫어했다. 유리에 비친 제 모습은 언제나 같았다. 단정했으나 초라했고 텅 빈 공간을 채우고자 거울 앞에 바짝 다가가도 허전함을 채울 수 없었던 까닭이다. 평소에 제 얼굴을 매만져본 일도 없어 아무리 더듬어도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목소리가 겁이 난 듯 잔뜩 떨렸다. 


“제가……. 지금 어떤 얼굴을 하고,”


“그만!”


크게 호흡을 들이마신 줄리아가 숨 쉬기가 버거운지 주먹으로 가슴을 내려치곤 겨우 숨을 뱉었다. 쉽게 말을 뱉지 못하는 입술이 파리하게 떨렸다. 그녀는 터지는 울음을 어떻게든 참아내려 애를 쓰고있었으나 그뿐이었다. 한번 터지기 시작한 눈묵은 끝을 모르고 흘렀고, 무어라 콕 꼬집어 말할 수 없는 감정이 한 음절 한 음절, 위태롭게 매달려 있었다. 


“더 이상 말하지 말아요, 제발. 제가 당신을…….”


해버릴 것 같은 말이 더 있었던 눈치였으나 줄리아는 자존심처럼 입을 꾹 다물었다. 대신 잊고 싶다는 듯 눈을 질끈 감았다. 버틸 수 있는 것은 거기까지였다. 고요하지 못한 밤이 내렸다. 결국 그녀는 주저앉아 창살을 붙든 채 한참을 소리 없이 억억 울었다. 앙리와 같은 사람이기 때문에. 어쩌면 줄리아였기 때문에 알아챘을 미세함이었을지도 모르나, 이제는 그녀가 빅터를 사랑한다는 이유로 매일 밤 악몽처럼 찾아올 어둠이었다. 




쇠창살 달린 창 밖으로 달을 볼 수 있었다. 구름이 바람에 떠밀려 그믐달의 허리를 가렸을 때, 문득 지난날 제 어미가 뇌리에 새겨 넣던 말이 떠올랐다. 넌 평생 누굴 사랑할 수 없을 거야. 그럴 자격 없이 태어났으니까. 그녀가 바투 잡았던 뺨이 이제와 다시 아렸다.


엘렌에게 그렇게 말한 일이 있었다. 빅터는 제게 친구 그 이상의 존재예요. 빅터의 유령을 알게 된 날, 울다 겨우 잠든 밤을 보내고 눈 뜬 이른 새벽에 고요하게 가라앉은 공기를 호흡하며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앙리는 빅터에게 있어 평생 친구일 것이다. 다만 빅터를 앙리에게 무슨 말로 정의하면 좋을 것인가. 친구 이상, 기적 같은 그런 적당한 말들이 아닌 관계를 도무지 찾을 수가 없었다. 


“엄마.”


겨우 찾은 단어가 불편한 것인지, 뒤척이던 그날의 새벽처럼 앙리는 차가운 돌바닥에서 도무지 편안할 수 없었다. 이제라도 알아서 다행일까, 왜 이제야 알았을까, 혹은 계속 모른 채로 끝이 났어야 했을 것을. 앙리는 넋두리하듯 조용히 읊조렸다.


“저주가 풀린 것 같아.”


죽을 때가 다가오니 생각이 많아졌다. 평소에 거울을 잘 들여다보지 않는 앙리였다. 어떤 표정이었을까. 뒤늦은 호기심이 일었다. 어떤 표정을 하고 있었기에 줄리아는 자신도 몰랐던 앙리를 알았던 걸까. 빅터의 앞에서도 같은 모습이었을까, 함께하는 시간동안 빅터의 앞에서 어떤 얼굴로 서있었고 빅터는 앙리의 어떤 얼굴을 본 걸까. 분명 빅터는 몰랐을 것이다. 그는 앙리 본인도 모르는 앙리를 알았다 하여도 실험을 위해서라면 앙리를 곁에 둘 수 있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알았더라면 그의 이름을 부르게 허락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1사단 무기연구소에서 제게 담요를 덮어 주지도 않았을 것이고, 손을 덮어 잡지도 않았을 것이고, 어느 날 밤 불쑥 찾아와 한 침대에 눕자고 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그날 펍에서 앙리가 권하는 술을 주는 대로 받아 마시지도 않았을 것이고, 미친 사람들처럼 춤을 추고 난 뒤 앙리를 껴안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날 귀를 덥히던 더운 숨과 가슴에 맞닿았던 세찬 심장의 고동이 여전히 선명했다. 아. 빅터는 다 알고서도 그럴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몰랐을 것이다. 괜히 마른세수를 했다. 다행이다. ……다행인가.


앙리는 사랑을 받아 본 일이 없기 때문에 사랑하면 할 수 있는 것들에 어떤 것이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가정은 의미가 없다. 앙리가 진즉에 빅터를 향한 제 시선의 이름을 알았다 하여도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알면서도 생각은 꼬리 물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를 위해 당장 다음 날 형장으로 끌려갈 사람이 우습게도 그런 후회나 하고 있었다. 진작 알았더라면 난 뭘 할 수 있었을까.


그런 감상에 젖어 있을 때 간수가 말했다. 앙리 뒤프레. 면회. 면회를 올 사람이 달리 더 남았던가. 벽에 기댄 머리를 문을 향해 돌리자 지척에서 지친 발걸음 소리가 처벅처벅 울렸다. 이내 인영 하나가 시야에 들어차 앙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앙리.”


목소리가 희미하게 젖어있었다. 멀리서 보아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을 만큼 그는 수척해있었다. 그 모습에 순식간에 코끝이 시큰해지는 것이, 목이 잠기려는 것을 꿀꺽 침을 삼켰다. 울었어? 장난처럼 뱉어보려다 참았다. 그래, 알았다면 너는 나를 위해 울지 않았겠지. 다행이다, 다행이 맞는 걸까. 머리가 복잡하여 무난한 아무 말이나 건네었다. 


“와줬구나.”


“왜 그랬어. 왜 나 대신,”


“그냥……. 웃으면 안 돼?”


“뭐?”


“바꿀 수 없으면, 나 그냥 웃으면서 보내주라.”


그리움이 그렇지. 눈에 새기면 흘러 넘치니까 그런 것 아니겠나. 


평생 홀로 살았다. 외로운 것은 익숙해서 괜찮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언젠가 룽게의 말이 맞았다. 빅터의 모습을 눈에 담고 마주하고 있는데도 사무치는 그리움에 섣불리 감정을 토해 버릴까, 앙리는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눈을 닫는다 하여 이미 새긴 얼굴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고, 목소리가 그립지 않았던 것도 아니었다.


“어떻게…….”


아. 보지 말고 듣지 말았어야 했다. 어차피 워털루에서 한번 죽었던 목숨, 빅터 덕분에 조금 더 오래 살았다. 그래서 초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 줄 알았다. 빅터를 보고 나니 그게 안 된다. 마지막으로 네 얼굴을 한 번 더 볼 수 있어서 물색없이 웃음이 새어 나오려는 데도, 네 앞에서 덤덤하게 서 있을 자신이 조금씩 무너진다. 대신 누명을 뒤집어 쓴 선택을 절대 후회하지는 않았고 다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대도 같은 선택을 할 것이나, 이런 모습과 시간이 마지막이라는 게 안타깝다. 지나간 시간만큼이나 겪어보지도 못한 빅터와 함께할 수 있을 미래가 그리워졌다. 산다 한들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곁에서 조용히 자리나 지키고 있는 것이 전부이겠으나. 함께 꿈꾸었던 세상에, 그가 만들어 낸 세상 위에서 처음 만난 그날처럼 빅터가 내민 손을 잡을 수 없다고 생각하니 그게 또 사무치게 서러워서……. 살고 싶다. 후회는 하지 않지만 이제와 너무,


나, 살고 싶어 빅터. 그 말이 튀어나오려는 것을 겨우 삼켰다.


“운명이라고 생각하자.”




아. 그래도 편지는 쓸 수 있었겠구나.


형장으로 걸어오는 길에 사람들이 던진 돌에 맞아 미쳐버린 걸까. 정말로 죽음이 목전으로 다가온 순간에 겁을 먹은 이성이 저 멀리 달아나 버린 걸까. 단두대 위로 올라가는 계단에서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은 앙리는 매일매일 빅터 앞으로 도착하던 줄리아의 편지를 떠올렸다. 친우에게 그 정도는 할 수 있으니 편지가, 쓰고 싶다. 난간살을 붙잡고 겨우 일어나려는데 뒤에서 앙리의 뒷덜미를 거칠게 잡아당기는 바람에 고개가 쳐들렸다. 준비가 되지 않은 눈에 태양이 들어와 눈을 질끈 감았다. 뒤에서 떠미는 손길에 눈 먼 사람처럼 계단을 더듬어 올라갔다. 태양에 하얗게 타버린 시야 탓일까. 순식간에 현실감이 사라졌고 사람들의 아우성 소리가 저 너머로 아득하게 들렸다. 그 어느 밤처럼 프랑켄슈타인 성 안 제 방 안에 홀로 남은 기분이었다. 한 걸음, 한 걸음 단두대로 올라가는 계단으로 힘겨이 발을 내딛으며 앙리는 펜을 드는 상상을 했다. 


친애하는 빅터에게.


무슨 말을 쓰는 것이 좋을까 생각하기도 전에 현실로 돌아올 시간이라는 것을 알려주듯 뒤에서 오금을 쳤다. 휘청거리며 무릎을 꿇었다. 다시 한 번 뒷덜미가 우악스럽게 붙잡히더니 목덜미가 어딘가로 쑤셔 넣어졌다. 포숭줄이 묶인 손에서 땀이 흥건하게 배어 나왔다. 턱이 달달 떨려 아랫입술을 꾹 말아 씹었다. 우득, 살이 뚫리는 소리가 나더니 입에 비릿한 맛이 돌았다. 펜 끝에 잉크를 찍어 조심스레 써내려갔다. 


많은 말을 쓰지는 못할 것 같아. 


연서가 될 수 없는 연서였다. 


빅터.


쓰지 못했으니 부칠 수도 없는 편지였다. 


빅터.


쓸 수 있는 것이 네 이름뿐이다.


끝을 맺어야 하는데, 


아. 잘 참았던 눈물이 후둑 떨어졌다.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철컹.


단두대 칼날 뒤로 앙리의 머리가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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