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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phers/short

[이글다이] someday



*  

“아…….”  웃음은 흐느낌을 닮아있었다. 그것을 마지막으로 모든 소음이 죽었다. 온도를 잃고 명암만이 남은 세계에서, 허연 것이 그의 위로 수북이 쌓였다. 사뿐하게 내려앉은 눈이 이글 홀든 눈물 자국을 덮고, 또 덮고, 그렇게 그의 위로 켜켜이 쌓였다. 사부작, 흘러 녹지도 않는, 그런 눈이었다. 



*

“그래. 말도 안 되는 이야기지.”

형한테는. 창틀에 앉아 비스듬히 등을 기대고 있던 이글은 무릎위로 깍지 끼고 있던 손을 풀어 쭈욱 기지개를 켰다. 대답대신 돌아오는 표정이 너무 지지부진해 따분하기라도 하다는 듯 늘어지게 하품을 했더니 창문에 어설프게 들러붙은 빗방울만큼, 딱 그만큼 눈가가 젖었다. 하품 하느라 잔뜩 찌푸렸던 미간을 펴고 눈치라도 살피듯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여전히 덤덤한 시선과 다시 마주쳤다. 이글은 다시 뒷머리를 창문에 콩, 소리 나게 기대고는 시선을 옆으로 굴렸다. 달리 어쩌겠는가. 용기라곤 전장에서 목숨을 내놓아 싸우는 순간이 전부인 그였다. 검을 손에 쥔 순간에는 항상 이긴다는 확신이 있었으나, 감정은 검으로 결단을 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애초부터 승리가 아닌 패배를 확신하고서 덤빈 싸움의 당연한 결말에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이글은 알지 못했다. 저도 기억하지 못할 아무런 말이나 떠드는 지금이 그 나름대로의 최선이라는 소리다. 


“그러니까.”


하아. 이글은 삐뚜름히 기운 고개로 톡, 토독 빗방울이 두드리는 창문에 입김을 불었다. 이제, 장마가 시작이던가. 허연 김이 번진 자리를 손가락으로 슥슥 문질러 닦았다. 딱히 의미는 있지 않았다. 허연 김이 다 사그라든 자리를 하염없이 문질러 닦는 것도, 애써 대수롭지 않게 흘리려 애쓰는 입꼬리도, 고백의 순간도, 다시 한 번 더 무의미해질 뿐인 발화도 다이무스 홀든은 다 잊을 것이다. 기억할 만한 가치도 없을 만큼


“한 여름날에 눈이 오면,”


말도 되지 않는 이야기니까. 


“우리 사귀자, 형.”


후회는 마침표 뒤에 따라오는 녀석이다. 대답도 없이 이내 돌아서는 발걸음 소리와 닫히는 문소리 뒤 찾아온 정적에 이글은 왜 백마를 타고 오지 않았을까, 왜 무릎 꿇지 않았을까, 왜 꽃다발과 값비싼 보석을 바치지 않았을까 하고 헛헛하게 미소 지었다. 하긴 그런다고 달라질 이야기였을까. 이글은 괜스레 한 손으로 마른세수를 한 뒤 비 내리는 창밖만 멀거니 바라보았다. 이걸로 될 리가 없었지만, 이걸로 되어야만 했다. 달리 방법이 있겠는가. 어쩔 수 없이 다이무스 홀든이 원하는, 아니 스스로 그리 될 순 없으니 적어도 다이무스 홀든이 기억하는 이글 홀든으로 다시 살아갈 수밖에.



*

그가 다리를 절며 걷는 길마다 벌건 줄이 섰다. 피가 뚝뚝 떨어지는 자리마다 눈이 시꺼멓게 썩어 움푹 꺼졌다. 그는 죽어가는 이가 으레 그러하듯 감각을 하나 둘 씩 잃었다. 고통 따위는 이제 잊은 지 오래였다. 오로지 명암 뿐, 시야가 흐릿했다. 이제는 들리는 소리마저 없어 어쩌다 이곳에 왔는지, 이곳은 어디인지 현실감마저 사라졌다. 다이무스 홀든은 그가 지금 위태롭게 딛고 선 곧이 어디이며, 이제 더는 해도 보이지 않는 이곳에서 어디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지 알 수도 없었고, 길도 아닌 이 길이 과연 그곳으로 자신을 인도하고 있는지도 알 수 없었으나 단 하나의 목표만이 그를 움직이게 했다. 언제 꺼져도 이상하지 않을 가쁜 숨을 훅훅 내쉬었다. 땀으로 더운 목덜미 위로 잿빛 눈송이가 떨어졌다. 눈은 녹지도 않고 그의 목덜미에 시꺼멓게 엉겨 붙었다. 그게 살이 썩은 자리처럼, 꼭 죽음이 들러붙기라도 한 자리처럼. 그래, 이 싸락눈이 내려앉는 감각만이 어렴풋이 유일했다. 


눈. 그래, 아직 겨울을 맞이하려면 두 번의 계절을 더 보내야하는데도. 그 어느 날 이글이 말 한 것처럼 놀랍게도 한 여름날에 눈이 내렸다.


놀랍게도 그리고 우습게도 다이무스 홀든은 최후의 수단 같은, 겉만 번지르르할 뿐 결국 제 혈육을 죽이겠다는 소리나 다름없는 말에도 이성적일 수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다만 말에 전우의 숨통에 검을 겨누면서고 기어코 피를 보면서까지 부린 아집이 대의를 이기지 못했을 뿐이었다. 쾅, 터지는 굉음과 함께 섬광이 내리꽂은 자리에는 죽음만이 남았고, 존재하는 것들을 증오하기라도 하듯 불타오르던 화마조차 죽어버린 자리에는 생이 비어버린 그 자리를 기리기라도 하듯 다 타버린 재만이 너울너울 춤을 추며 내렸다. 성탄절을 앞둔 한 겨울날의 눈처럼, 고요하게. 눈물조차 흘릴 수 없을 정도로 비현실적인 풍경이었다.


다리에 힘이 풀려 풀썩 쓰러지자 잿더미가 푸스스 피어올랐다가 이내 그를 질식시키기라도 할 기세로 다시 가라앉았다. 죽기 직전의 벌레마냥 다이무스는 푹 하고 뭉개지는, 알 수 없는 무언가를 팔로 짚어 어렵사리 몸을 일으켰다. 아.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는가. 한 여름날에 눈이 내리면 서로 마음껏 사랑하자는 그 미친 소리를, 하지만 정말로 언젠가 자신의 심장 한 모퉁이를 베어줄 수 있는 그런 날이 오면 하고 상상해 버리고 마는 물색없는 심장을. 다 알고 있었겠지, 그래, 이글은 간악했다. 이글 홀든은 지는 내기 따위는 하지 않는 남자였다. 그러니 이렇듯 한 여름에 눈이 내리지 않는가. 허억, 설움이 몰려오는 숨을 뱉고 어룽지는 눈가를 손등으로 대충 문질러 닦은 뒤 그는 다시 비척비척 걸었다. 핏자국이 다시 길을 그었다. 그는 항상 약자였다. 이글의 앞에서는 질 수 밖에 없음을 인정해야했다.  


눈이 나린다. 그러니 내가 너를 찾아가겠다. 살아 있거라.